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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an 18. 2023

마늘 까는 남자는 섹시해


‘망했다. 이건 알리오 올리오가 아니야.’

괜히 냄비나 팬이나 이것저것 꺼내기 싫어 한때 유행했던 원팬 파스타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맛봤다. 가장 조회수가 높은 레시피를 따라 했는데 온통 맛있다는 댓글 속에서 나 홀로 망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마늘을 너무 많이 넣어 문제였던 건지, 레몬즙 대신 넣은 멸치액젓이 문제였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꾸역꾸역 먹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체다 치즈를 투하했지만 맛과 비주얼 모두 더욱 이상해지고 말았다.

‘이 정도면 많이 먹었어. 포기하자 그만.’

깐 마늘이 없어서 냉동실에 있던 간 마늘을 넣었는데 아무래도 양이 좀 많았던 모양이다. 면을 덜어내고도 팬 바닥에 마늘이 잔뜩 깔려있던 걸 보니 뭐라 변명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이 한국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어디 있을까?

‘자 마지막으로 이 고추장찌개에 마늘을 넣어 완성해 봅니다. 넣어 보세요.’
‘한 숟가락이면 되니까, (움푹) 간 마늘을 아이스크림 싱글 콘에 올라간 만큼 퍼서 넣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진짜 한국인이다. 마늘 없이 도마와 칼을 꺼내 든다니 말도 안 된다. 마늘은 모든 요리의 핵심이다. 우리 집엔 냉동실을 열면 늘 마늘이 있었다. 아마 모든 가정집에 얼린 마늘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얼린 마늘 조각을 꺼내 미역국에 넣고, 고추장찌개에 넣고, 나물에도 넣고, 고기양념에도 넣는다. 마늘은 필수품이다. 집에 마늘이 없다면 한국인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은 제육볶음을 해볼까? 미리 양념 좀 재놔야지’

냉동실을 열었는데 마늘이 동이 나있었다. 이사 첫날 아빠가 빻아서 엄마가 챙겨준 간 마늘이 드디어 바닥난 것이다. 원팬 파스타에 마늘을 너무 많이 넣긴 했다.

‘마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데...’

큰일이었다. 마늘 없이 어떤 요리도 할 수 없는 나는 진정한 한국인이다. 다음 날 바로 장을 보러 갔다. 마늘의 고장답게 커다란 망태기에 들어있는 흙 묻은 마늘, 깐 마늘, 간 마늘이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다만, 마늘을 직접 까기에 나는 너무 게을렀고, 열심히 빻기엔 집에 절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어. 그냥 간 마늘을 사자.’

함께 장을 보러 간 짝꿍이 간 마늘을 집어 든 내 손을 제지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마늘 다 먹어서 마늘 사야 하는데?”
“간 마늘을 왜 사. 직접 까야 맛있어. 그리고 이게 훨씬 더 싸. 자취생의 자세가 안 됐네 아직.”

폭풍 같은 잔소리가 내 귀를 관통했다.

“나는 저 한 망태기를 다 깔 자신이 없어.”
“내가 까줄게.”     

아무리 찾아봐도 적은 분량만 덜어놓은 마늘이 보이지 않았고 가장 작은 망태기가 가장 큰 망태기였다. 결국 마늘을 다 까주겠다는 짝꿍의 호언장담을 믿고 망태기를 사 왔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평일이 지나갔고 주말이 왔다. 2~3일 정도 마늘 없이 마른반찬에 맨밥을 먹었다.


프리랜서에게 주말은 한 달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 귀한 날이다. 급히 마감해야 하는 날에 주말에 몰려 있다면 그마저도 찾아오지 않는다. 일요일, 번역 마감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가서 일해. 내가 마을 다 까 놓을게.”

짝꿍은 나를 도서관에 내려놓고는 집으로 휑하니 사라졌다. 대신 마늘을 까 놓겠다고 결연히 다짐하곤. 마감 때문에 정신이 없던지라 나는 고분고분 도서관에 내려 하루 종일 작업에 몰두했다. 점심시간이 지났고 오후 해가 떨어질 때쯤 집까지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계단 근처에서 맴도는 마늘 냄새에 웃음이 비짓 새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싱크대 앞에 붙어 서서 마늘을 까는 중이었다. 분홍색 플라스틱 바구니엔 깨끗하게 까 놓은 마늘이 수북하게 쌓여있었고 개수대 안에는 물에 불리는 중인 덜 깐 마늘이 둥둥 떠다녔다.

“절반 밖에 못 깠어.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앞으론 사 먹자.”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마늘을 놓질 못하는 거니. 머쓱해하며 그만 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의 집념이 양 어깨와 등으로 느껴졌다. 짝꿍은 그렇게 20분 넘게 더 마늘을 깠다. 든든한 뒤태가 어찌나 섹시하던지 종종 마늘을 망태기로 사놔야겠다고 생각했다.


핑크색 바가지에 잔뜩 싸여있는 마늘 알은 매끄럽고 뽀얬다. 마늘로 유명한 지역이라 그런지 명성에 걸맞은 모양새였다. 마늘은 빻는 재미가 있다. 절구에 넣어 콩콩 두드리면 으득 으깨지고 한 알 한 알 추가할수록 으깨진 마늘이 늘어나면 쾌감이 든다. 요리 채널을 보고 배운 것들을 따라 한답시고 요즘엔 칼날을 비스듬히 눕혀서 통마늘을 으깨서 사용한다. 두세 알 으깨서 다다다다 칼질로 다져주면 유튜브 속 유명 요리사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우리 집 마늘의 대주주인 짝꿍에게 감사함을 표하고자 아침부터 마늘을 꺼내 들었다. 고추장찌개를 끓일 생각이다. 간 마늘을 가장 마지막에 넣어야 알싸한 맛과 감칠맛이 오래 지속된다. 호박, 감자, 스팸을 썰어 넣고 끓이다가 마지막에 마늘 한 숟가락 크게 넣으면서 생각했다. 오늘 저녁은 알싸한 향이 진동하는 마늘을 편 썰어 넣은 정통 알리오 올리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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