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래 Jan 19. 2023

어렵지만 쉬운 카레 만들기

물론 예전에도 카레를 만들어본 경험은 있다. 카레 가루만 있으면 어쨌든 카레를 완성할 수 있으니 어려울 것도 없다. 그래서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전파되어 보편적인 요리가 탄생한 모양이다. 요즘엔 굳이 해외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색깔, 맛, 모양이 전부 다른 인도식, 태국식, 일본식, 한국식 카레를 접할 수 있다. 언젠가 채소가 왕창 들어간 샛노란 한국식 카레에 질려 태국식 카레를 해보겠다고 세계 식자재 마트에 가서 코코넛 밀크와 향신료를 사 왔었다. 열심히 닭 안심살을 볶다가 카레 가루를 풀고 코코넛 밀크도 넣었는데 저녁 식탁에 올려놓기 민망할 정도로 밍밍한 카레국이 탄생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카레 가루가 문제였던 것 같아.’

태국식 카레를 만드는데 한국 카레 가루를 넣은 게 문제인가 싶어 심기일전하여 일본식 고형 카레를 사 와서 일본식 카레에 도전한 적도 있다. 색과 맛은 일본식 카레였다. 다만 여전히 카레국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고기를 먹지 않던 몇 해 동안은 채소만 넣어 카레를 끓였는데 영 맛이 없었다.

‘카레가 뭐 어려운 요리도 아니고’

고기 대신 냉장고에 남아있던 게살을 찢어 카레에 넣었는데 너무 짜서 밥을 더 많이 먹어야 했다. 아무래도 게살의 염도가 높았던 것 같다. 내 게살 카레를 맛본 짝꿍이 은근슬쩍 물었다.

“자기는 왜 카레에 고기를 안 넣어?”
“고기 넣으면 너무 탁하지 않아? 맛이 없었어.”

(카레는 원래 탁하다.)

“언제 해봤는데?”
“몰라 어릴 때. 그리고 나 한국식 카레 별로 안 좋아해”
“... 다음엔 고기 한 번 넣어봐.”     

미역국, 된장찌개, 카레, 소고기뭇국. 국물이 들어간 한식 요리의 기본은 고기 육수지만 어릴 땐 고기를 볶아 육수를 내는 국물 요리가 입맛에 맞질 않았다. 먹고 나면 입안이 텁텁하고 속은 더부룩했다. 


매번 카레 앞에서 실패를 맛보면서도 끊임없이 카레에 도전하는 이유는 채소 써는 소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카트를 끌고 마트 채소 코너를 이리저리 배회하며 이거 저거 골라 담을 때부터 마음이 들뜬다.

‘이 당근이 더 싱싱한가, 저 당근이 더 싱싱한가.’

무게나 생김새, 상처 여부를 비교하며 당근, 감자, 양파, 버섯, 호박을 골라 담으며 카트의 빈자리를 채워 넣는다. 집으로 돌아와 작은 냉장고에 테트리스 맞추듯 이리저리 재료를 집어넣고 나면 일단 준비 끝이다. 채소를 왕창 사 온 주에는 더 열심히 집밥을 만들어 먹게 된다. 아까운 재료를 썩히긴 싫어 뭘 만들어 먹을지 더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워본다.

'카레 끓이고 남은 호박과 감자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음. 당근은 계란말이에 넣을까?'


카레 만드는 날은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아직 흙 내음이 담긴 채소를 잔뜩 꺼내놓고 흐르는 물에 세척하고, 껍질을 벗기고, 바구니에 담아 놓는다. 제자리에 가만있질 못하는 둥근 채소부터 하나씩 꺼내 왼손으로 단단히 잡고 칼을 바로 세워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 나간다. 썩뚝 썩뚝. 커다랗던 감자가 작아진다. 채소를 지나 도마에 칼이 닿을 때마다 탁, 탁, 탁 소리가 나고 규칙적인 리듬에 안도와 안정이 밀려온다. 부드럽게 칼날이 들어가는 호박, 자꾸만 칼날에 들러붙는 버섯, 단단한 당근까지 써는 게 좋아서 계속해서 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바구니 가득 작게 썰린 채소다.

‘흠. 카레 가루가 한 봉지 더 필요하겠는데?’


“엄마, 카레에도 원래 고기 들어가?”
“당연하지. 네가 워~낙 싫어하니까 안 넣긴 했지만 원래 들어가면 더 맛있지. 고기 들어가서 육수 내면 뭐든 맛있는 법이야.”
“그냥 마트 가서 국물용 사 오면 되는 거지?”

이번엔 반드시 성공하리라 마음을 먹고 마트 정육 코너에서 국물용 양지를 보고 있는데 마침 경주한우가 40% 세일하길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냉큼 골라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 본 국물용 등심을 꺼내 키친 타올로 핏물을 제거한 후 프라이팬에 넣고 달달 볶았다. 한우 특유의 우유 비린내와 고소한 냄새가 올라와 나도 모르게 한 조각 집어 먹었다.

‘맛있잖아... 잘게 썰려 있지만, 정체성은 소고기라 이건가.’

고기를 볶다가 단단한 채소부터 투하했다. 이리저리 저을 때마다 국자에 부딪히는 채소 조각의 촉감이 손바닥에 전달되었다. 고기 기름을 흡수해 익어가면서 진한 색을 띨 때쯤 나머지 양파나 버섯처럼 물렁한 채소를 넣어 한데 볶아줬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무렵 카레 프랜차이즈가 유행했었다. 친구 중에 카레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녀석도 있었는데 그곳은 일본식 카레를 표방하는 가게였다. 흰 고두밥에 일본 카레 특유의 진하고 묽은 갈색 소스를 잔뜩 부어주고 나머지 토핑은 손님이 선택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토핑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달랐다. 밥 기본과 국물 기본을 제외한 모든 토핑이 돈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갖은 채소가 잔뜩 들어간 한국식 카레는 맛도 있고 영양가도 풍부한 음식이다. 카레 하면 특정 브랜드의 샛노란 카레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이번에 마트에 가보니 카레 종류가 다양했다. 우리나라 브랜드 여럿에 태국, 일본, 등 카레로 유명한 나라의 온갖 분말이 들어와 있더라. 굳이 세계 식자재 마트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10분 넘게 볶았을까? 미리 개어 놓은 카레 분말을 한 국자 투하했다. 

‘치이익’

소량의 수분이 들어가자 달궈져 있던 프라이팬 가장자리와 바닥에서 자글자글 끓어댔다. 레시피에는 쓰여있지 않지만, 예전에 호박돼지찌개를 만들 때 해봤던 스킬을 한 번 써보기로 했다. 돼지와 고추장, 고춧가루를 볶다가 물을 조금씩 넣어서 계속 볶는 기법으로 국물이 더욱 진하고 감칠맛이 산다고 했다. 카레에도 적용되는 사항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뭐, 육수가 진할수록 좋은 건 돼지 찌개나 카레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두 국자째 부었을 때, 언뜻 시간을 보니 벌써 1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 안 되겠다.’

서둘러 남은 카레 가루를 다 넣어버렸다. 그대로 중불로 푹 끓이다가 눌어붙겠다 싶으면 국자로 휙휙 저어줬다. 중간에 간을 봤는데 살짝 짠 것 같아 물을 더 부었다. 먹기 전에 한 번 더 끓일 요량으로 요리 시작 1시간 10분 만에 불을 끄고 부엌에서 벗어났다. 평소보다 길게 걸린 아침 요리 시간이었다. 채소를 썰다가 시간을 너무 허비한 걸까? 아니, 즐기다가 훌쩍 지나간 걸까? 일찍 일어나 집중하는 오전 시간을 보내겠다고 시작한 습관인데 카레 덕분에 제대로 실천한다. 온몸에 카레 냄새가 배어버렸다. 겉으로 봐선 성공인데 아무래도 고기 넣기 전과 후를 비교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 고기에 카레 넣었는데 한 번 먹어볼래?”

짝꿍을 불러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커다란 그릇에 흰쌀밥과 카레를 듬뿍 푸고 이번에 한 김장 김치를 꺼내면 점심 식탁 차림 끝이다. 냉장고 상태가 시원찮아 담근 지 한 달밖에 안된 김장 김치는 이미 푹 익어버렸다. 단출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재료와 시간이 들어간 카레를 두고 짝꿍과 나란히 앉아 흰쌀밥과 비벼 한입. 김장 김치 올려 한입 무아지경으로 먹었다.

“우물우물, 좀 맛있다?”
“내가 고기 넣으면 맛있다고 했지? 조금이 아니라 완전 맛있는데?”

인정하긴 싫지만, 고기 넣은 카레가 게맛살만 넣은 카레보다 훨씬 맛있었다. 채소만 넣은 카레보다도 맛있었다.     

    

“엄마 카레에 고기 넣으니까 맛있네? 엄마도 이제 넣어봐.”
“원래 넣어. 너 없어서 요즘엔 미역국에도 고기 넣고, 소고기뭇국도 끓여서 잘 먹고 있어.”
매거진의 이전글 마늘 까는 남자는 섹시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