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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an 24. 2023

땅콩 전병과 커피 한 잔

 

매주 금요일은 근처 마트로 장을 보러 가는 날이다. 한 주 동안 떨어진 채소나 먹고 싶었던 요리의 재료를 적어놨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보러 간다. 예전엔 사람 붐비는 주말을 피해 평일에 가거나 필요할 때마다 동네 마트에서 샀는데 평일 쇼핑은 가계부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호박이 990원이라고?”

어쩌다가 이틀 연속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간 날이었다. 분명 어제 2,300원 주고 산 호박이었는데 금, 토, 일은 990원 특가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호박 옆 감자도, 건너편 매대의 버섯도 어제보다 가격이 낮았다. 분명 어제 봤던 그 녀석들인데! 그때부터 매주 금요일 장을 보러 간다. 확실히 할인 폭도 크고, 원 플러스 원 상품도 많다. 게다가 고기도 자주 할인해서 찌개용 국거리든 요리용 목살이든 원하는 부위를 사서 냉동시켜 두고 종종 실력 발휘를 한다.


대형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가면 매장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특별 판매 매대에 쌓여있는 온갖 군것질거리가 맞아준다. 평소엔 딱히 관심이 없어 카트를 끌고 채소 코너로 직행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오늘은 할머니 과자, 전병을 팔고 있었다. 전병이 우리 전통 과자는 아니다. 화교나 일본의 전통 과자로 우리 전병은 등산 가면 입구에서 파는 메밀전병이 더 친숙하다. 그래도 여전히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간식거리다. 나도 어릴 때 할머니 집에 가면 늘 전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양쪽 할머니와 유대관계가 깊지 않다. 흔히 할머니 손에 맡겨진 손주들은 며칠 새에 오동통한 아이가 되어 나온다는 전설적인 경험도 없다. 친가와 외가 모두 애정 표현을 진하게 하는 분들이 아니셔서 ‘우리 강아지’ 혹은 ‘공주님’ 같은 표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두 분 다 표현만 안 하실 뿐이지 명절이면 먹을 것을 잔뜩 준비해서 오매불망 손주들을 기다리신다. 거기엔 전병도 있었다. ‘할머니가 우리 OO이 온다고 사 왔어.’ 하면 눈치 한 번 보고 집어 먹는 시늉을 했던 기억이 난다. 손바닥만큼 커다란 모양도, 누리끼리한 색깔도, 초콜릿 하나 안 들어간 맛도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속상하실까 봐 맛있게 먹는 시늉을 했다. 눈치를 보며 한두 개 집어 먹다가 슬며시 내려놓고 동생 손을 잡고 다른 과자를 사러 갔던 것 같다.


시식하라고 작게 잘라놓은 땅콩 전병을 몇 개 집어 먹다가 홀린 듯 가격을 물어봤다.

“이거 3개에 얼마예요?”

오랜만에 옛 기억이 나 커피랑 몇 개 집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물어봤는데 웃음기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500g부터 팔아요. 만원입니다.”

500g은 어느 정도인거지? 게다가 만원이라니! 이 정도면 수입 과자보다 비싼 거 아니야?

“아, 500g이면 어느 정도예요?”

아저씨는 솜씨 좋게 흰색 봉다리를 휙 뒤집으시더니 양손으로 한 움큼 과자를 집으며 보여주셨다.

“이 정도예요.”
“아... 그럼 이따 장 다 보고 다시 올게요.”

줄행랑을 치듯 장 보러 들어가 버렸다. 가격도 가격인데, 양이 너무 많잖아. 저 정도면 1년 내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사 온 지 4일 됐는데 1/3이 사라졌다) 카트에 호박을, 목살을, 두부를 집어넣으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전병을 사, 말아.’

계산이 끝나고 망설이다가 결국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자석처럼 이끌려갔다. 시식을 몇 개 더 집어 먹고는 과감하게 질렀다.

“500g만 주세요! 땅콩이랑 저 김 박힌 삼각형이랑 반반 섞어서요.”

이거 한 움큼, 저거 한 움큼. 무게를 재니 600g이 넘는다.

“16000원 나왔는데 괜찮으세요?”
“네, 뭐 주세요.”     


“상술인 게 분명해, 일부러 10000원 더 넘게 잡은 걸 거야 투덜투덜”
“수제잖아. 게다가 지금만 파는 거고.”     

사고 나서도 너무 비싸다고 계속 투덜대자 옆에서 한마디 한다.

거름종이처럼 생긴 전병이라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아.


알람을 맞춰놓지 않고 잠에 빠진 느긋한 토요일 아침이다. 9시가 조금 넘어서 눈이 떠졌다. 포근한 이불에 파묻혀 한참을 여유롭게 만끽하다가 일어나 씻고 서둘러 사과를 깎아 먹었다. 

‘아! 나 전병 사 왔잖아.'

단골 카페에서 로스팅한 지 하루가 막 지난 신선한 원두도 사온 참이었다. 바삭바삭한 땅콩 전병을 똑 끊어 한 입에 쏙 넣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오늘은 아침 요리 대신 핸드드립이다. 포장을 뜯자 참기름보다 고소한 향이 퍼졌다. 원두 봉지에 코를 박고 음미하다가 원두를 한 스쿱 퍼서 분쇄기에 넣자 '후드드드' 떨어지며 고소한 소리가 났다. 드르륵 원두를 갈면 보글보글 끓던 커피포트가 ‘탁’ 소리를 내며 준비 완료 신호를 보내온다. 머그잔에 거름종이를 올리고 방금 간 원두를 부으면 아직 물이 닿지도 않은 원두 가루에서 고소하고 진한 향이 뿜어져 나와 방안을 가득 채운다. 쪼르륵 물을 부어가며 커피를 내리고 미리 꺼내 둔 땅콩 전병을 책상 위에 올려둔다. 읽을거리를 펼쳐 놓고 커피 한 모금, 전병 한 입, 오랜만에 즐기는 아침 여유를 신성한 의식 치르듯 꼼꼼하게 훑어 보냈다. 이번 명절에도 할머니는 전병을 사놓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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