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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an 26. 2023

귀찮을 땐 간계밥


끔뻑, 끔뻑. 베개에 파묻은 얼굴, 축 쳐진 양팔, 두 눈을 다 뜰 기운조차 없었다. 간밤에 누가 눈두덩이에 딱풀을 붙여 놓은 걸까? 목이 미친 듯이 탔다. 눈도 뻑뻑하고, 몸도 무거운 게 설마... 또...?

아, 전날 와인을 마시고 잤구나. 이번 설은 참으로 풍요로웠다. 한 동안 아침에 일어나 요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은 통조림 햄과 참치, 조미김, 엄마표 마른반찬 여러 통, 잡채, 불고기, 한우 세트가 곳간에 들어찼다. 그중엔 훌륭한 스페인산 와인 2병도 포함이었다. 

“이거 비싸대. 5만 원, 17만 원짜리라던데?”

가격을 알자 맛이 더욱 궁금해졌다. 호시탐탐 맛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으나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체감 온도 영하 24도를 기록한 경이로운 날, 남은 잡채로 잡채밥을 만들어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뜨끈한 물로 개운하게 샤워를 한 후 나와 느긋하게 따뜻한 보리차까지 마시고 난 늦은 밤, 자꾸만 와인병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전에 살짝 맛만 볼까 싶어 가격이 낮은 와인 1병을 오픈했다. 경험상 와인의 품질은 가격과 크게 상관관계가 없다. 가격이 높다고 백 퍼센트 맛있고 훌륭하지 않았고, 가격이 낮다고 품질이 나쁘지도 않았다. 물론 전문가의 의견과 상관없이 내 입맛에 맞아야 하지만. 예상외로 가벼운 바디감과 스모키 한 오크향이 훌륭했다.

“치즈 꺼내 올게.”
“감말랭이도 가져와.”

(설 연휴 동안 감말랭이도 생겼다.) 살짝 맛만 본다는 게 두 잔, 세 잔을 불렀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러니 눈꺼풀이 무겁지. 당연한 일이야.

즐거움의 대가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밥솥에 밥이 남아 있던가. 오늘 찌개를 할까 했는데’

채소를 썰어야 할 손가락이 파업을 선언해 버렸다.     


귀찮을 땐 간계밥, 무조건 간장 계란밥이다. 냉장고에서 달걀 1알을 꺼내 미리 달궈놓은 프라이팬에 ‘톡-톡-’ 깨고 약불에 천천히 익힌다. 샛노란 노른자가 봉긋하게 솟는다. 스피드가 생명이니 곧바로 다음 단계에 착수해야 한다. 밥통에서 어제 먹고 남은 밥을 싹싹 긁어 대접에 푸고 간장 두 큰술, 방앗간표 참기름을 휙휙 크게 두 바퀴 두르고 다시 프라이팬으로 돌아간다. 노른자가 완전히 익기 전에 꺼내야 한다. 덜 익은 흰자의 미끄덩거리는 느낌은 싫지만 고소한 노른자에 밥을 비벼 먹으면 맛있다. 최대한 흰자만 익혀보려고 살살 불 조절을 해가며 완성한 계란 프라이를 참기름과 간장으로 코팅한 밥 위에 얹었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직접 볶고 빻아서 고소한 깨소금을 듬뿍 넣고 신나게 비빈다. 뚝딱 한 끼 완성이다.


어릴 때 간계밥 한 번 안 먹어 본 사람이 있을까? 서둘러 등교해야 할 때, 입맛은 없지만 한 숟갈이라도 억지로 먹어야 할 때 엄마는 간계밥을 뚝딱 비벼왔다. 귀찮지만 밥 안 먹고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가풍을 따라 급히 등교하던 아침에는 늘 간계밥이 있었다. 요즘에도 귀찮거나 급할 때마다 종종 해 먹고 있다. 여기에 조미김을 싸 먹거나 볶음 김치를 올려 먹으면 상 위에 잔뜩 차려놓고 먹는 것보다 맛있을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간계밥 레시피는 집안마다 다르다.


“귀찮은데 그냥 간계밥이나 해 먹자.”

대학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자극적인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긴 싫었고 그렇다고 냉장고에 딱히 재료가 많은 것도 아니라 대충 간계밥을 먹게 되었다. 친구는 제일 먼저 버터를 꺼내 들었다. 



“버터가 왜 들어가?”
“간계밥 먹자며”
“그니까 버터가 왜 들어가냐고.”
“간계밥에 버터 들어가잖아!”
“버터 녹일 시간 있으면 뭐 하러 간계밥 해 먹냐. 간계밥의 핵심은 속도야 속도.”

그 친구가 평생을 먹어온 간계밥 레시피는 이러했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듬뿍 넣고 살살 녹인다. 계란을 까서 넣은 후에 스크램블드 에그를 만든다. 간장으로 간을 하고 밥을 넣고 볶듯이 비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맛있었다.

“맛있네.”
“아무렴, 버터가 들어갔잖아!”
"너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이렇게 해주셨어?"
"응!"     

버터가 끝이 아니었다. 다른 '조리법'도 있었다. 바로 버터 계란밥보다, 우리 집 간계밥보다 짧은 조리 시간을 기록한 날계란밥이다. 그네 집은 일본풍 간장 계란밥을 선호하여 일단 밥그릇에 밥을 푸고, 날계란을 까서 넣고, 그 위에 계란과 참기름을 뿌린 후 살살 조금씩 비벼 먹었다.

“간계밥은 그냥 날계란이 핵심이야.” 

흰자의 미끄덩한 감촉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미끄덩한 감촉이 떠오르면서 몸서리쳐졌다. 개인 취향을 존중하는 우리는 버터에 볶든, 날계란을 투하하든, 무단하게 계란프라이로 가든 각자 시간 대비 최고의 맛을 내는 레시피를 따라가겠거니 인정해 버렸다. 그래도 진짜. 원조. 정통. 간계밥은 계란프라이를 넣어 비비는 우리 집 표 간계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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