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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Feb 02. 2023

스타벅스 새해 리추얼 "몇 잔 마셨니?"

  

도시 여자는 스타벅스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커피 이외에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딱히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산미를 좋아하는 내게 너무 강한 맛이다. 해당 브랜드를 좋아하는 아마추어로서 소견을 붙이자면 스타벅스는 커피 전문점이라기보다 문화다. 그래서 맛이 떨어질지언정 내 발길은 끊기지 않을 것이다. 음악, 조명, 소음, 나무책상, 콘센트, 초록 인어까지 나를 사로잡는 요소이다. 도시인 시절 출근 전 스타벅스에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책을 읽거나, 영어 뉴스를 보거나, 글을 쓰는 자기 계발은 하루 중 가장 보람된 수확이었다. 30분 혹은 1시간을 스타벅스에서 보내다가 회사로 향하곤 했다. 그 여유로운 분위기와 자기만족에 취해 스타벅스로 출근하길 반년 정도 되었을 때부터 지출에 무감각해지고 말았다. 적립형 카드로 결제하다 보면 어쩔 땐 공짜로 마시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연말이면 노력하지 않아도 다이어리 서너 개는 거뜬하게 받을 수 있을 만큼 리워드가 쌓였고 동료에게 기분 좋게 리워드 스티커를 쾌척하기에 이르렀다. 그해에 스타벅스 지출은 전체 지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지만, 결코 아깝거나 후회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스타벅스라는 문화가 좋았다.     


“작년에 스타벅스를 몇 번이나 갔을까?”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한 나만의 신년전통이다.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며 나는 스타벅스에 얼마를 갖다 바쳤나 수치를 확인하고 감상으로 풀어냈다. 사용한 금액에 비해 내가 얻은 것을 정량적, 정성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스타벅스가 없는 시골로 전입하면서부터 고난이 시작되었다. 초록 로고 박힌 강한 커피 한 잔 못 마신다고 딱히 내 삶에 풍파가 들이닥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유로운 분위기, 적당한 백색 소음과 재즈풍 음악... 그러니까 익숙한 공간이 없는 낯선 지역에서 낯선 사람들과 적응해야 하는 현실에 예상치 못한 막다른 길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것보다 더 큰 문제였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스타벅스 매장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라 3~40분 차 타고 인근 도시로 쇼핑이나 나들이를 나가면 스타벅스 매장을 만날 수 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보일 때마다 들러 책이라도 한 장 넘기고 돌아왔으니 의례적으로 2022년에는 몇 잔을 마셨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총 76건, 489,700”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구나. 반경 20km 안에 스타벅스는 없지만 내 집념은 20km를 뛰어넘는 모양이다.     

지난주 일요일에는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 금요일부터 쏟아지던 비가 일요일까지 이어졌다. 잔뜩 흐린 날, 뼛속을 스멀스멀 타고 오는 추위 때문에 따뜻한 우유 생각이 간절해졌다. 일요일은 암묵적으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다고 내 위장과 합의한 덕분에 아침도 대충 넘어갈 수 있다.

이럴 땐 라테를 마셔야 하는데...
‘그래, 드라이브 스루에 도전해 보는 거야.’


시골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단호하다. 자가용. 외부의 힘으로 굴러가며 나를 원할 때 어디든 실어 나를 수 있는 동력 물체.

아무래도 시골에 살면 차 없이 생활하기 어렵다. 차 타면 20km인 거리도 무한대로 늘어나게 된다. 특히 이리저리 다닐 일이 많은 프리랜서는 요즘 들어 부쩍 운전할 일이 늘었다. 급히 면허만 따놓고 2년 가까이 지갑 속에 고이 모셔놨는데 살기 위해 운전하다 보니 핸들이 손에 익어 차선 변경이나 장거리 운전도 예전처럼 무섭지 않다. 혼자서 처음 가는 길이나, 처음 해보는 일은 여전히 긴장된다.


바쁜 오후 시간, 일하다가 갑자기 따뜻한 커피 한잔이 절실하다. 가까운 드라이브 스루 매장까지 차를 끌고 나간다. ‘드라이브나 할까?’ 드라이브도 할 겸 한 바퀴 돌아 스타벅스 드라이브 스루로 진입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한 손으로 멋있게 핸들을 돌려 주문하곤 음료를 받고 미소와 인사를 함께 날리며 돌아오는 길에 호로록 한 입, 사무실에 돌아와 천천히 음미하며 일을 마무리한다.     


비 오는 일요일 아침에 초보 운전자의 로망을 실현할 기회가 찾아왔다. 반짝이는 도로가득 천천히 와이퍼가 인사하는 풍경을 달려 익숙한 초록 매장으로 향했다. 아주 조심스레 천천히 핸들을 돌리며 앞차 꼬리를 물었다. 코너에 차를 박을까 거북이보다 천천히 움직였다.

따뜻한 라테 그란데 사이즈에 거품 적게, 헤이즐넛 드리즐 보통으로

정신없어 실수할까 봐 미리 사이렌 오더로 주문을 해놨다. 천천히 한 차 한 차 빠지는 틈만큼 운전해서 들어가 음료를 받았다.

뜨거운 음료를 운전하면서 마시는 일은 불가능한 거구나.     

고양이 혀에게 로망은 실현하기 어려웠다. 멋들어지게 운전하며 음료를 마시고 싶었지만 근처에 정차해 놓고 천천히 식힌 후 한 모금 마시기로 한다.


차를 몰아 인근 공원으로 향했다. 댐과 마주 보는 공원에 자욱한 안개가 서렸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의자를 살짝 젖혀 늦은 아침 따뜻한 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발가락까지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갔고 으스스해 보이던 이슬 속 공원도 비 오는 날 파리의 어느 공원처럼 보였다. 끝이 가늠되지 않는 흐린 하늘을 뚫고 나갈 듯 우뚝 솟은 앙상한 나무도 운치 있어 보였다. 라테를 홀짝거리다가 음악을 틀었다. 공원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운치를 즐기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지 한 대, 두 대 차가 연이어 들어오더니 얕게 젖는 겉옷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원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영 일어나기가 힘들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도 가지 않아 더욱 게을러진다. 일요일이라 다행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요리하는 대신 드라이브 하는 셈 차를 끌고 나와 새해 첫 스타벅스를 개시했다.

올해 스타벅스 스코어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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