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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Feb 21. 2023

다정한 일상과 고구마 빠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nothing matters

    

겨울 초입  어느 아침 고구마를 한 박스 선물 받았다. 

'저벅저벅, 쿵'

둔탁한 발소리에 이어 무거운 상자를 쿵하고 떨구는 소리가 들려 현관문을 열었더니 호박 고구마 한 박스가 놓여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엄마가 보냈을 터였다. 

'일부러 호박 고구마로 보냈으니까 맛있게 쪄 먹어!'


찬바람이 불어오면 군것질거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호빵, 붕어빵, 국화빵, 호떡, 군고구마, 어묵까지 나 어렸을 때는 주황색 군것질 천막 찾기가 버스 정류장 찾기보다 수월할 정도로 많았는데 날카롭게 상승한 물가 때문인지 붕어빵 천막도, 어묵 트럭도 찾아보기 힘들다. 겨울철 간식 애호가에게도 큰 부담이긴 하다. 천 원으로는 붕어빵도, 호떡도 양껏 먹기도 어려워졌다. 익숙하던 풍경이 하나둘 스러지는 것 같아 아쉽고 쓸쓸한 마음이 들지만, 변해가는 세상과 치솟는 물가를 어찌할 방도가 없다. 대신 내겐 호박 고구마 1 상자가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아침에 일어나 고구마에 묻어있는 흙을 깨끗이 씻어 찜기에 넣고 한 시간 동안 약한 불에 천천히 찌면 달콤하고 촉촉하고 고소한 호박 고구마가 완성된다. 


근데 이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고구마는 예민한 아이다. 더울 땐 습기 차서 썩고, 추울 땐 퍼렇게 얼어버리고 만다. 선물 받은 지 두 달이 넘어가는데 입이 짧은 탓에 아직도 고구마는 절반 이상 남아있다. 찐 고구마를 하도 먹었더니 물려서 오랜만에 고구마 맛탕이나 만들어 먹기로 했다. 한파가 다시 시작된 추운 겨울철 집순이 간식으로 제격이다. 유튜브에 고구마 맛탕 레시피를 검색하니 처음 보는 단어가 보였다. 고구마 빠스.

‘요즘엔 고구마 맛탕이 아니라 고구마 빠스라고 하는 모양이야.’


고구마 맛탕은 초등학교 때 가장 좋아했던 급식 반찬 중 한 가지였다. 설탕을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엄마의 방침으로 우리 집 음식에는 조미료가 거의 들어가지 않았고, 간식도 건강식이었다. 학교 급식은 양이 제한되어 있으니 1명 당 배식받는 양은 기껏해야 3개, 남학생이나 체격이 큰 학생은 4개였다. 

'밥 안 주고 고구마 맛탕만 주면 좋을 텐데.'

달콤한 고구마에 더 달콤한 설탕이 끈적하게 묻어나는 맛탕을 양껏 먹고 싶어 만들어 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던 것도 아니고, 유튜브 요리사도 없던 시절, 엄마는 나름 창의력을 발휘해서 맛탕을 만들었다. 건강하게. 기름에 튀기지 않고 고구마를 익히려고 깍둑썰기를 한 후 끓는 물에 삶았고 건져낸 고구마를 프라이팬에 넣고 흑설탕을 뿌려가며 굴렸다.  우리가 알던 비주얼이 나오지 않자 다급해진 마음에 점점 더 많은 설탕이 투하되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고구마 무스가 완성되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집 식탁에 고구마 맛탕은 올라오지 않았다.

 

유튜브에 올라온 고구마 빠스는 튀길 필요도 없고 설탕 시럽으로 고구마를 코팅하기 때문에 바삭하고 손으로 집어 먹어도 묻지 않는단다.

'도전해 볼 만 한데?'

먼저 고구마를 깨끗하게 세척한다. 껍질 채 요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냥 쪄 먹을 때보다 두 번, 세 번 더 벅벅 문질러야 한다. 양 꼭지를 잘라서 버리고 숭덩숭덩 조각낸 고구마를 잠시 동안 물에 담가 전분기를 뺀다. 고구마 맛탕을 자주 안 해 먹는 이유 중 하나는 기름에 튀기기 때문이다. 웍에 식용유를 가득 부어 고구마를 튀기고 나면 기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치가 아프다. 고구마 빠스는 튀기지 않고 만들 수 있다. 숭덩숭덩 조각낸 고구마를 일단 전자레인지에 3~4분 정도 돌려서 80% 정도 고구마를 익히자. 적당히 익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살짝 먹어본다. 프라이팬에 적당히 기름을 둘러 고구마를 구워야 한다. 구운 고구마는 더 고소하다. 특히 껍질 부분이 노릇노릇 해지도록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구운 고구마를 일단 접시에 꺼내둔다. 

“이것만 먹어도 맛있다. 그냥 설탕 녹이지 말고 먹을까?”

호박 고구마라 당도가 높아서 그런지 굽기만 해도 맛있는 고구마에 굳이 설탕까지 입혀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왕 고구마를 꺼내 들었으니 ‘빠스’를 완성해야겠지.


방금 사용한 웍에 기름을 5큰술, 설탕을 6큰술 넣고 약불에서 살살 녹인다. 절대 휘저으면 안 된다. 웍을 돌리면서 설탕이 저절로 녹게  만들어야 한다. 설탕이 녹아 시럽이 되면 구워둔 고구마를 투하하고 설탕 코팅을 입힌다.

“왜 이러지?”

설탕이 녹았어야 하는데 아직도 쌓여있다. 

‘불이 너무 약한가? 아니면 식용유대신 카놀라유를 쓴 게 문제인 걸까?’

불을 더 세게 올리니 설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고구마 투척'

영상에서 본 것과 다른 조리 과정이 펼쳐졌다. 고구마가 이리저리 엉겨 붙기 시작했다. 분명 물처럼 흐르는 설탕 시럽이 고구마를 감싸야하는데 왜 내 고구마와 설탕을 엉겨 붙는 거지?


겨우 버무린 끝에 혹여나 달라붙을까 고구마를 하나씩 꺼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식히기에 돌입했다. 고구마를 젓가락으로 집어 쟁반 위에 펼쳐 놓는데만 30분이 걸렸다. 어휴, 내가 알던 맛탕에 비해 품이 많이 든다. 버무리면 끝이 나야 하는데 버무려서 서로 떨어뜨려 놓고 식혀야 한다. 당연히 식힐수록 맛있다. 구운 고구마에 얇은 달고나 옷을 입힌 맛이다. 구우면서 한두 개, 설탕에 버무리다가 한두 개, 잘 식었나 확인하다가 한두 개 영상에서 본 고구마 빠스가 완성되었을 때 이미 배가 불렀다. 부엌에서 손으로 집어먹던 고구마 빠스를 접시에 담아 컴퓨터 앞에 앉았다. 미뤄놨던 영화를 볼 여유가 생겼다.    



인생을 살며 내린 수천, 수만 가지의 선택의 가지에서 뻗어나간 또 다른 나 자신이 이 우주에 포진하고 있다면 얼마나 흥미진진할 것인가! 그 선택 중 ‘잘못’된 선택을 내란 나-1은 선택의 기로에서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내려 나-1-1이 되고 결국 매 선택의 순간 매번 ‘잘못’된 길로 나아간 가장 불행한 나-XXXXX는 다른 선택으로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사는 수많은 나를 목격한다. 후회한다. 상처받는 말을 한다. 관계가 파괴될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직전, 내 다정한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내 곁의 다정한 이가 사랑을 일깨워준다. 폭력은 사라지고 문제는 일단락된다. 후회하며 과거로 회귀하는 것도, 다른 꿈을 좇아 미래롤 달려가는 것도 아니라 현재의 내 삶에 감사하고 충실한다.  <everyhing everywhere all at once> 


어쩌면 평범하다는 단어는 다정하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닐까. 평범하게 흘러간 무채색인 하루도 내 다정한 일상에 일조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누구나 상상해 봤을 법한 상황이다. 

‘만약 내가 이런 결정을 내렸더라면 어땠을까.’ 

모든 것이 모든 순간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면, 더욱 내 곁의 다정함을 지키고자 평범하게 하루를 살아가겠다.  

“이 영화는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자아, 사랑, 가족, 관계, 평화... 복합적이네.”
“다정한 일상을 이기는 폭력은 없어.”
"당신의 존재로 인해 크리스마스가 없어지더라도 당신 덕분에 내 일상은 다정할 거야."


결국 포옹하고 화해하는 과거와 미래, 다정함과 난폭함, 엄마와 딸을 보자, 고구마를 준 엄마 생각이 났다. 내 일상이 눈앞에 스쳐갔다. 고구마를 선물 받는다. 겨울 아침에 눈을 떠 달콤한 간식을 만들고, 햇빛 내려앉은 거실 바닥에 앉아 달콤한 간식을 즐기며 영화를 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눈다. 함께 손을 잡고 분리수거를 하러 나간다. 공기는 차갑지만,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한다. 집에 돌아와 꼭 껴안고 잠에 든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아침에 찾아본 고구마 맛탕 레시피가 그래서 고구마 빠스 레시피로 뜬 거였군. 멀티버스야.'

집에 처치 곤란 고구마가 있다면 간식으로 꼭 고구마 빠스를 만들어 보세요. 

달콤하고 다정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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