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만큼 추상적이면서 현실적인 단어는 없다. 두 발이 서 있는 곳, 내가 사는 곳, 반에서 몇 등인지, 일 년에 얼마 버는지, 직책이 어떻게 되는지, 내년 이맘때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내 인생의 위치를 나타낼 말을 끝없이 늘어놓을 수도 있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어릴 때부터 나는 나중에 어디에 서 있을지 궁금했다. 어느 대학을 졸업해서 어느 회사를 다니고 얼마만큼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고 얼마를 벌고 어느 집에 살고 있을지. 인간이 본인의 성장과 발전을 떠올리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치열하게 살아가는 종족으로 경쟁을 마다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스스로 망가뜨리면서도 숨 가쁘게 달린다.
‘나는 지금 만족하는가? 여긴 어디지? 다음은 어디지?’
펑!
오류가 생겼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고 같은 방향의 손과 발이 나가기 시작했다. 바보처럼 보이긴 싫은데 멈출 수가 없었다.
챙그랑
내 안의 무언가가 깨져버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가 싫었다. 세상에 내가 못 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 아주 맹랑한 어린이였지만 달리기만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에서 빠지지 않는 코너가 있다. 반별 50m 달리기와 계주.
담임 선생님이 ‘심부름할 사람? 발표할 사람? 대회 나갈 사람?’ 하면 매번 1등으로 손들던 내가 유일하게 피하는 종목이 바로 달리기였다. 달리기를 못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친구들과 즐겁게 술래잡기하거나, 놀이터에서 뛰놀 때도 오로지 '술래에게 잡히지 않도록' 빨리 달린다는 목표뿐이었기에 '달리는 폼이 웃길까?' '나는 어떻게 달리고 있지?' 따위의 의미 없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깔깔깔, 어머 얘, 그렇게 달려선 어림도 없겠다.”
“00아 너 달리기 진짜 웃기게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맞는 가을 대운동회에서 내가 달리는 모습을 본 아줌마들은 장난스레 날 놀렸다. (매우 재미있어하던 표정을 지금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창피하고 화가 났다. 어린 마음에 나를 놀리는 아줌마들이 미웠고 이후로도 데면데면하게 대하며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도망 다니곤 했다. 웃기게 달린다는 놀림에 나는 그때부터 달리지 않았다. 해마다 돌아오는 운동회에서 50m 달리기 순서가 되면 내 차례가 오기 전부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정신없는 담임 선생님 눈을 피해 뒷순서 친구에게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슬쩍 빠져나왔다. 중학생이 되어 더 이상 50m 달리기를 하는 운동회 따윈 없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고 더불어 체육 수행평가에 달리기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생각보다 소심한 아이였다. 자신감 넘치고 재수 없이 나대는 애로 기억하는 동창들이 많겠지만 사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관심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더욱 자신감 넘치는 척 자꾸만 앞으로 나섰는지도 모른다.
"엄마, 나 달리는 폼 이상해?"
"엄청 잘 달리지는 못하지."
누군가 나를 놀릴 때마다 같이 속상해하고 화를 내던 엄마도 내 달리는 폼에 이견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과부하가 걸려 오른발과 오른손이 같이 나가면 코미디 그 자체일 게 분명했다.
성인이 된 나는 다른 방법으로 달렸다. 힘든 프로젝트에서 돋보이려고 '달리고' 완수 후 동료들과 술을 '달리고', 돈을 벌기 위해 '달리고', 더 유명해지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달렸다'. 성인이 되어서도 내가 하는 방식이, 내가 품은 사고가 남에게 비웃음을 사면 어쩌나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육체적으로 달리지 않았을 뿐 내 머릿속과 마음속은 무게추의 한계를 훨씬 초과하는 체중계의 바늘처럼 혼란스럽게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늘 달리고 있다. 하루는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잘 달리지도 못하는데, 달리기도 싫은데 왜 목적지도 모른 채 아등바등 달려야 하는 거지?"
나는 공동체 생활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다. 개인적인 성향이 굉장히 강해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흉을 볼 정도라 스스로 단체활동이나 팀에 속하는 일을 멀리하는 편이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공감할 텐데 우리가 이기주의자는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도 이타심과 배려심 넘치고 공감력이 강하지만 개인으로 더 행복할 뿐이다. 어릴 때부터 '도대체 이거 왜 같이 해야 하지? 비효율적이잖아. 게다가 난 관심도 없는 일인데 돈 아까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자가 속 편하게 살기에 녹록지 않다. '00의 민족'이라는 별칭이 많이 붙다시피 하나 됨을 강조하며 튀는 개인보다 협조적인 팀원이 쉽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가슴팍에 이름표를 달고 키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받는 초등학교 입학식 때부터 눈치챘다.
나는 대학 생활 4년 동안 과방이나 동아리방에 발을 들여본 적이 없다. 학생회비도 안내서 시험 기간에만 나눠주는 소중한 간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본 기억도 없다. 수업을 마치면 벤치에 앉아 멍 때리거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영상실에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태어나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4년이었다. 혼자 밥 먹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혼자 학식을 먹거나 후문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고 때론 학우들 사이에서 파스타 맛집으로 유명한 (인테리어가 온통 인형으로 도배된) 식당에서 혼자 까르보나라를 시켜 먹었다.
어느 날 취직한 선배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대로 한국에 눟러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점심마다 메뉴를 못 골라."
"회식 때 술을 너무 마셔."
"팀장님이 너무 가부장적이야."
"구두 신고 출근해야 해."
선배의 고충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와 환경에 있었다. 나는 각자 먹고 각자 일한다는 해외 취업 시장에 눈을 돌렸고 대학교 4학년 2학기 말, 내가 원하는 외국계 회사에 들어가려면 석사를 따야 한다는 새로운 결론을 내렸다. 대학원에 가자니 돈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 회사에 취직했다. 빨리 돈을 벌어 이 땅을 뜨는 게 유일한 목표였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신기하게도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개인'도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 나름 적응하며 잘 살아간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365일이 흘러 있었다.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제야 겨우 뜨뜻해진 탕에서 안락과 안정을 유지하고 싶은 숨어있던 속마음이 나를 설득했다.
"지금 딱 좋지 않아?"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와 비슷하게 달린다. 아줌마들의 놀림이후로 달려본 기억을 손에 꼽으니 당연하다. 폼은 여전할 것이다. 중, 고등학교 때는 얼마나 달리는 폼이 웃기길래 그렇게 나를 비웃었던가 궁금해서아무도 없는지 주변을 살핀 뒤 상점 유리창에 비치는 옆모습을 바라보며 달려 본 적도 있다. 주위 시선을 의식하며 잔뜩 굳어버린 상체는 '어떻게 하면 안 웃기게 달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듯 꼿꼿했다.
'웃긴 폼으로 달리면 어때.'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안의 무게추가 깨져버렸던 날, 아무도 예측할 수 없도록 당연하다는듯 앞이 아닌 내가 원하는 대로 아무 방향으로 달리겠다고 결심했다. 달리다가 걷다가 잠시 주저앉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조정한다. 6년 동안 3번의 입사와퇴사, 2번의 이직, 그리고 귀촌, 창업끝에 이제 겨우달리는 방향과 속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달리기는 싫지만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