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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Oct 07. 2024

우리 산책 가자

내 작은 발걸음

     

해가 지고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엉덩이에 본드라도 칠한 듯 소파에 딱 붙어있는 짝꿍에게 산책을 제안한다. ‘그래’하고 벌떡 일어날 때도 있지만 ‘귀찮아’가 돌아오기도 한다. ‘그럼 나 혼자 나갔다 온다’하고 일부러 부산스럽게 겉옷을 챙겨 입고 현관 중문을 열면 못마땅한 엉덩이는 마지못해 따라오게 되어있다.

‘이 밤에 어떻게 혼자 보내니’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뭘’

기쁘면서 괜히 구시렁거린다.     


혼자 갈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나 잠깐 바람 쐬고 올게’라고 했을 텐데 오늘은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싶었고, 밤하늘 별구경도 하고, 살갗에 스치는 가을바람도 맞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라고 했다.     


나는 산책이 좋다. 가만히 앉아서 일하다가도 불현듯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그냥 걷는다. 맥락 없긴 하지만 산책에 나설 때는 보통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골치 아픈 문제와 맞닥뜨렸거나 일하기 싫을 때인 것 같다. 사회 초년생 시절, 답답해 보이는 나를 알아차려 잠깐 나가서 회의하자며 눈치껏 빼준 선배가 생각난다. 테이크아웃한 커피잔을 들고 청계천을 걷거나 그대로 카페에 앉아 고민 상담을 늘어놓곤 했다. 아, 이럴 땐 선배가 후배를 데리고 나가 커피도 사주고 그러는 거구나. 그렇게 얻어 마신 커피만 몇십 잔이며 타인을 배려하는 산책을 알게 되었다.     


산책의 효과야 유명하다. 구글, 메타, 엑스의 수장들은 산책하며 생각을 환기하고 신박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자신을 다잡는다고 알려지면서 산책의 효용성과 가치에 대해 알려졌지만, 산책의 진면목은 직접 경험해 보고 유용함을 깨닫기 전까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왜 산책을 하는지.     


'쉼을 위해서야.'

'쉴 거면 앉아서 쉬지 굳이 힘들게 걸어야 해?'

심각한 평발인 내 짝꿍은 오래 걷는 걸 힘들어한다. 이래서 나중에 어떻게 세계여행을 함께 할까 걱정이 될 정도인데 평발의 고통을 잘 모르는 나도 최근에야 심각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보드라운 결 때문에 밟는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는 우리 집 겨울 카펫에 둥그런 타원형이 찍혀 있는 걸 보고 자지러지게 웃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진짜 평발이구나’ 아치형을 그리는 내 발바닥은 안쪽이 곡선을 이루며 들어가 있었지만 짝꿍의 발바닥은 만화 속 발바닥처럼 생겨 절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동반 산책을 권유하는 내게 약간의 짜증을 부리지만 못 이기는 척 잘 따라나선다. 산책이 좋은 걸 몸이 알기 때문이 아닐까? 하루 종일 앉아서 작업하는 우리에게 산책은 자양강장제와 같다. 몇 시간 내리 앉아 작업하다 보면 짓눌린 양 볼기와 불안정한 척추 그리고 어깨와 목까지 엉망인 상태가 된다. 게다가 실내에서 온종일 에어컨 바람 (혹은 온풍기 바람)만 쐬다간 피부가 쩍쩍 갈라질 게 분명하다. 신체가 진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진짜 바람, 공기를 접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몸에게 그럴 의무를 진다.      


산책의 묘미는 정해진 목적 없이 발에게 선택권을 넘겨 앞으로, 뒤로, 옆으로 움직이는 행위에서 나온다. 목적지 없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냄새도 맡고, 나무도 보고, 바람도 느끼다 보면 생각의 환기와 마음의 안정, 긴장 완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찾아온다.     


여기서 고백하지만 나는 혼자 하는 산책을 훨씬 좋아한다. '그럼 맨날 혼자 가면 되겠네' 서운한 척 투덜거리다가 은근히 좋아할 짝꿍이 괘씸해서 비밀로 하는 중이다. 나보다 긴 다리로 내 보폭에 맞춰 함께 걷는 배려를, 내 손 안을 꽉 감싸는 온기를 무엇보다 사랑하지만 영감을 얻기 위해서, 진정한 쉼을 위해서라면 산책은 혼자해야 한다. 어떠한 인간의 언어도 없이 새로운 공기, 피부에 닿는 진짜 빛, 귓속을 파고드는 새소리, 아파리의 간질간질 부대끼는 소리를 느껴야 한다. 어느 순간 먹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던 머릿속이 차츰 맑아지고 좋고 바른 생각이 떠오른다.

‘산책을 하며 영감을 얻는다는 부자들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군.’     


새삼 세계 최고의 부자들의 말을 인정하며 영감을 얻기 위한 산책을 계속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산책을 한다는 자세가 불손하지만 종종 언젠간 나도 위대한 영감을 얻어 세계 최고까진 아니더라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겠지 바라면서 산책을 지속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산책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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