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를 찾아서>
2020년 겨울, 나는 3번째 퇴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회사에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 프리랜서가 될래.”
나름 에세이 한 권을 낸 작가였고, 번역 아카데미 과정 수료 후 문서 번역도 시작했으니 곧 역서 번역도 맡게 될 터였다. (과연) 비로소 자유롭게 살 준비를 마쳤다고 믿었다. 태어나서 처음 맞는 무소속의 새해에 마음 한구석이 초조했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맞섰다.
“왜, 꼭 회사에 다녀야 하는 건 아니잖아?”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즐겁게 돈 벌면 좋잖아!”
프리랜서의 삶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내 삶에는 리듬이 없었다. 당연히 프리랜서가 쉬워 보인다는 나약하고 무지한 추론에서 비롯한 결정은 아니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다수의 무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고, 스스로 납득을 할 수 없다면 실행하지도 않는, 사회적 기준으로 부적응자 같은 부류였다. 학교를 졸업하면 어디에도 얽히지 않고 필요한 일만 하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를 가나 학창 시절 단체 생활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혼자 움직이는 게 좋았던 나는 남들 눈에는 유별난 아이, 튀려고 나대는 직원이었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 좋았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으며,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일만 하면 밥을 혼자 먹든, 입술을 시뻘겋게 칠하고 다니든,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나였다. 뭘 해도 즐겁지 않았다. TV에 나와 자신의 성공 일대기를 설명하면서 두 눈을 반짝이는 사람들처럼 나도 부푼 마음에 아침에 눈이 저절로 떠지고, 손이 근질거리고, 답답해서 골머리를 앓다가도,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지만 벌써 3년 차가 되어가는 플랫메이트 다니는 재즈 가수가 꿈이라고 했다. 우리는 크고 황량한 집에 누군가 드나든다는 사실만으로 위안 삼고, 한 달에 한두 번 비정기적으로 거실에 모여 브런치를 먹는 관계였다. 어쩌다가 운 좋게 쉬는 날이 맞아서 브런치를 먹을 때에야 거실의 커다란 6인용 식탁은 제 역할을 해냈다.
다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지만 성인이 되자마자 지구 정 반대편, 낯선 나라에서 독립했고, 우리 중 최고참으로 거듭났다. 오랜만에 서로의 생존 여부를 확인할 겸 6인용 식탁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느지막이 배달시킨 인도식 난을 먹던 중 장래 희망 이야기가 나왔다. 장래 희망이라니, 마지막으로 꺼내본 게 언제였는지 모를 정도로 낯간지러워지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저학년 미술 시간이면 흰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내 미래 모습을 그린 후, 교실 맨 앞에 나와 한 명씩 발표하곤 했다. 내 꿈은 매번 피아니스트였다. 딱히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당시 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일이 피아노 연습이었고, 앞에 나가서 발표하려니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해 보여 ‘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줄곧, 초등학교 6년 내내. 중학교에 들어간 후 내 꿈은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학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유명한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전부 하나의 목표였을 뿐, 나는 꿈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내 삶은 남들과 다르다고, 특별하다고 착각하고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여기만 나가면, 이것만 끝나면, 내년에는, 곧, 내게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되뇌었지만, 정작 꿈꿔본 적도, 구체적으로 계획해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미래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나는 지극히 일반적인 대한민국 청년의 일반적인 루트대로 살고 있었다.
‘덜커덩’
완만한 타원형을 따라가던 내 인생 궤도가 최초로 모양을 비튼 건 한국을 벗어나면서부터였다. 2019년, 가족 곁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생각조차 해본 적도 없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남의 시선에 겁내지 않고, 나대로 살아가는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즐겁고, 자유로웠다. 사람이 싫다던 나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다니를 만났다.
“나는 재즈를 좋아해”
난을 뜯어 쌈을 싸 먹는 와중에 어쩌다가 재즈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다니는 수줍은 얼굴로 재즈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도 “I love Jazz, too.”라고 화답했다. 그저 재즈 음악을 종종 듣는 수준의 ‘좋아함’이었던 내 마음을 다니는 본인과 똑같은 수준이라 과대 해석을 해버렸다.
다니는 내게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냐며, 자신은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과연 그녀는 재즈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피아노를 아주 오랫동안 배웠다고 말했다. 다니는 환한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내 방에 피아노 있는데, 거실로 꺼내 놓을게. 언제든 연주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괜한 죄책감으로 최근에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back to black>을 자주 듣는다고 내뱉었다. 대답을 들은 다니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그럼 내가 부른 back to black 들어볼래?”
알고 보니 그녀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골수팬이었다. 아이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에이미 와인하우스라고 생각할 정도로 유사했다. 거친 듯 깊이 있는 목소리, 재즈와 한 몸이 되어 부르는 듯한 리듬과 감정. (부족한 식견에 이렇게밖에 전할 방법이 없다)
“나중에 재즈 앨범을 내고 싶어.”
다니의 꿈을 알게 된 뒤로 나는 그녀가 더 좋아졌다. 다니 역시 나의 (얕은) 알은체에 내게 더 친근함을 느끼게 된 듯했다.
꼭 재즈바에 놀러 가자는 약속을 한 지 한 달이 흘렀고, 운 좋게 쉬는 날이 맞았던 어느 날 밤, 잔뜩 지쳐 귀가한 내게 다니는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이제 할 만큼 한 것 같다고, 새로운 삶을 찾을 때가 된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곳을 벗어나면 다시 만날 수나 있을까? 기약 없는 약속은 싫었다.
“우리 그때 가기로 했던 재즈바 오늘 갈까?”
1년 만에 함께 밤 외출을 나섰다.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수크를 걸었고, 페르시아 레스토랑과 터키 레스토랑을 두고 고민하다가 2층 전망이 좋아 보이는 터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 조금은 진지한 미래 이야기,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언... 그리고 고대하던 재즈바로 향했다. 평일이라 내부는 한산했고, 나른한 공기마저 풍겼다. 다니는 이미 유명인사였다. 바텐더가 찡긋 윙크를 보냈고, 매니저가 맥주를 쐈다. 몸속에 저장된 땀마저 증발할 듯 냉기 가득한 공간에서 우리는 부르르 몸을 떨며 두어 차례 신청곡을 써냈고, 1시간 정도 음악을 듣다가 마지막으로 <back to black>를 신청했다. 달라진 건 없었지만 주변의 뭔가가 변한 듯했다. 애달픈 가수의 목소리가 내 몸을 통과해 나를 사로잡았고, 낮게 울리는 더블베이스가 내 심장박동이 되었다. 나란히 앉은 우리는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일주일 뒤, 그녀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외적 아름다움과는 무관하게 꿈이 있는 사람은 빛이 난다. 눈동자에 총기가 돌고 어둠이 찾아와도 반짝거린다. 다니와 보낸 시간이 즐거웠던 이유는 반짝거리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하면 내게도 아름다움이 깃들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감으로 그녀와 대화를 즐겼다. 슬프게도 거울 속에 비친 내 눈은 텅 비어 보였다. 새까만 터널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내게 꿈이 있던가, 내 꿈은 뭐지,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걸까. 학교만 졸업하면 자연스레 꿈쯤은 따라올 줄 알았다. 그런데, 졸업장만 있고 꿈은 없었다. 억울했다. 꿈이라는 게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니 속았다는 생각도 든다.
“남들 다 그러고 산다.”
때 되면 결혼하고, 애 낳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다 그렇게 산다니, 벗어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크레파스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뒷모습을 그리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느날, 시골에서 살아보지 않겠냐는 인스타그램 광고가 나를 사로잡았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 몰라.’
나는 꿈을 찾아 생전 처음 듣는 시골 마을로 떠났다.
시골에 도착한 첫날밤, 방문은 잠기지 않았고, 욕실 구석에서 쥐가 고개를 내밀었다. 익숙한 도시의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처음엔 이마저도 ‘내 재즈’를 찾기 위한 즉흥 연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보다 더 힘든 건,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와 마주하는 일이었다.
꿈을 좇아 혼자 내려온 곳에서, 뜻밖에도 나는 ‘무리’ 속에 갇혔다. 대학생 시절 이후로 경험해 보지 못한 합숙과 단체 급식, 활동복을 입고 함께하는 농활. 어딘가 익숙하고 불편한 리듬 속에서, 나는 점점 무음 상태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누군가 내 불행을 빌고 있는 듯 매달 기고하던 여행 웹진이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매달 들어오던 수입이 하나 끊기고 말았다.
꿈을 찾겠다며 내려왔지만, 정작 나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사고가 멈췄고, 감정은 무뎌졌다. 그 무감각의 끝에서 다니가 떠올랐다. 재즈바에서 적었던 작은 메모지, 그녀의 눈동자에 반사되던 내 모습, 그리고 냉기 속을 뚫고 울리던 더블베이스. 모든 게 멀고도 선명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일어나 주변 논두렁을 걸었고, 걷기 힘든 날엔 자전거를 탔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하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걸었다. 그리고 재즈에 대해 생각했다. 저 너머 어디쯤, 아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내 ‘재즈’가 조용히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걷는 중이다.
내 ‘재즈’를 찾아가는 여정, 그건 결국 나를 듣는 연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