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맨리비치
오래전, 여행 잡지에서 제주도에 귀촌한 요리사를 인터뷰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부터 안에 수영복을 갖춰 입는다는 낭만 가득한 요리사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점심 영업이 끝나면 짧은 브레이크 타임 동안 음식점 바로 앞에 있는 바다로 뛰어가 겉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바로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진다고 했다. 그날 이래로 나는 속옷 대신 수영복을 입고 여행지를 다니는 환상을 품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여러 차례 바다에 풍덩 빠질 기회가 있었지만, 아뿔싸 나는 수영을 못했다. 그대로 빠져봤자 몸만 적시고 나오는 꼴이 될 텐데 그건 낭만이 아니라 우스운 꼴이었다. 마침 작년에 수영을 배우면서 물속에서 느끼던 막연한 공포를 이겨냈고, 자력으로 물에서 이동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공포가 빠진 팔다리는 물속에서 더 자유로웠다.
‘이제 나도 속옷 대신 수영복을 입고 가벼운 원피스를 걸친 채로 여행지를 쏘다닐 수 있는 거야.’
시드니는 바다 근처 수영장이 굉장히 유명한 도시다. 쿼카나 코알라 대신 아름다운 본다이 비치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바닷가와 바로 근처에 바닷물로 가득 찬 천연 수영장은 시드니의 시그니처였고, 본다이 비치는 이번 시드니 여행에서 꼭 보고 싶은 장면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자주 가던 카페 벽에 요시고의 푸른빛을 연상케 하는 바닷가 옆 수영장 사진을 본 이후로 언젠가는 꼭 저곳에 가서 아름다운 푸른빛을 눈으로 담겠다고 다짐했다.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 비가 내렸고, 다음 날은 시내를 돌다가 하루를 보냈고, 그다음 날에는 하늘이 잔뜩 흐려 바다 수영에 적당한 날씨가 아니었다. 이러다가 가져온 수영복은 입어보지도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판이었다. 점점 초조해졌다. 수영도 할 줄 아는데, 이러다가 물에 발도 못 담그고 돌아가겠어. 추운 한국을 떠나 일부러 여름을 찾아왔는데 이대로 끝일까.
정든 로즈버리 숙소에서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돌돌돌 캐리어 바퀴 굴러가는 소리에 아쉬움이 질질 끌린다. 새 숙소로 향하는 길 내내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커다란 짐을 낑낑대며 겨우 도착했을 때 우리 둘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아침에 일기예보에 뜬 태양을 보자마자 속옷 대신 수영복을 입은 참이었다.
변덕스러운 시드니 날씨라지만 다행히 어느 때보다 맑은 하늘로 우릴 반겼고 급한 대로 짐만 두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페리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본다이 비치는 아니었지만, 일단 써큘러 키로 가서 고속 페리를 타고 가까운 맨리비치로 향할 계획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나서도 시무룩해한다면 바보야.’
쨍한 햇살에 반짝거리는 오페라 하우스의 모자이크 타일과 맞은편의 하버브리지 꼭대기에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페리를 타고 지나가다 보이는 찰나의 광경조차 아름다워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페리에 탄 승객들이 모두 탄성을 내뱉으며 카메라를 들이대기 바빴다.
‘본다이 비치 못 가면 어때. 여기도 너무 아름다운걸.’
맨리 비치에 간다면 꼭 아니타 젤라또에 들러야 한다. 페리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 코너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가게가 보인다. 쫀득한 이탈리아식 젤라또다. 수많은 맛 중에 가장 많이 팔린 2가지 맛을 골라 나눠 먹으며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저 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어.”
맨리 비치의 높은 파도가 자잘하게 부서져 흩날리며 환상적인 아지랑이를 피어 올린다. 반짝거리는 호주의 햇살 아래 부서진 파도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어른거렸다.
‘드디어 시드니의 바다야.’
파도가 높은 맨리 비치를 지나 해변을 따라 늘어선 산책로를 걸으면 잔잔한 쉘리 비치에 도착한다. 아기자기한 해변가에 사람들은 비치타월을 깔고 누워 낮잠을 청하고, 태닝을 하고, 수다를 떨고, 행복을 나눈다.
방금 바닷가에 들어갔다가 온몸에 소금기를 묻히고 돌아온 비키니를 입은 멋쟁이 할머니들이 우리 옆에 자리를 잡았다.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지만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입고 싶은 거 입고, 하고 싶은 거 하는 모습이 멋스럽다.
호주에서는 아이들조차 튜브를 사용하지 않는지 모두가 그냥 바닷가로 풍덩 빠진다. 매거진 속 요리사처럼.
우리도 서둘러 겉옷을 벗고 바다로 달려갔다.
“앗!”
입으로 짭짤한 바닷물이 들어오고 선크림이 눈으로 들어가 따끔거린다. 생각보다 낮은 수온에 온몸이 떨려왔다.
“cold isn’t it?”
낯선 이가 나와 똑같이 덜덜 떨면서 말을 붙였다.
“춥지?”
“응, 엄청 춥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소리 내어 크게 웃고 싶어졌다.
온몸이 떨리도록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수영 교실에서 배운 것처럼 멋지게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고 싶은데 긴장한 탓에 팔다리가 굳어 자꾸 몸이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짠 바닷물 때문에 더 긴장이 되어 얼굴 담그는 것조차 망설이게 된다.
“여기 발 닿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긴장을 풀어 봐.”
여러 번 시도 끝에 성공했다. 이제 바다에서도 둥둥 떠다닐 수 있다!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해변가에 펼쳐 놓은 짐이 엉망이 되어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바로 옆자리에서 타월을 피고 수다를 떨던 할머니들이 이야기해 준다.
“저기 저 칠면조가 네 가방을 헤집어 놓고 갔어.”
“그래요?”
“가방에 먹을 게 있니? 아니면 상관없어.”
“먹을 것도 없는데...”
야생 칠면조 두어 마리가 돌아다니더니 동네 깡패처럼 주인 없는 빈자리 짐을 헤집어 놓고 다니는 중이었다.
누워서 햇볕을 쪼이다가 아쉬운 마음에 다시 바다에 들어가 짠물 세례를 받고 엉성하게 헤엄 몇 번 치고 돌아왔다. 아쉽지만 돌아갈 시간이다. 그래도 목표 달성이다. 바다 수영.
돌아오는 길에 맨리 비치 근처의 가게 중 한 곳을 골라 피시 앤 칩스와 생맥주 2잔을 시켜 간단한 요기를 해결했다. 방금 막 튀긴 듯 뜨거운 감자튀김에 입천장을 델 뻔했다. 바라문디로 만든 생선 튀김에 레몬즙을 뿌려 한 입 가득 넣고 차가운 맥주로 꿀떡 삼킨다. 맛없기로 유명한 피시 앤 칩스조차 일품요리 같다. 행복한 기분에 도취되어 아무 말이나 뱉다가 지긋이 바다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쳐 웃음이 터지고 만다.
약간 알딸딸해진 상태로 느릿느릿 걸어 페리를 타러 돌아왔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내일도, 내일모레도, 돌아가기 전까지 시드니의 바닷가만 찾아다니고 싶다.
결국 본다이 비치만 못 보고 여행은 끝났지만, 아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