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 맞이한 저녁

- 시드니 여행기 3

by 밤 비행이 좋아


규칙이 없는 자유여행에서 서로 다른 두 여행자는 반드시 한 번 이상 다투게 되어 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다.


‘호주는 좀 여유롭게 돌아다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이 정도면 굉장히 널널하게 다닌 거야. 남들은 우리 어제랑 오늘 본 거 하루에 다 봐.’


‘너는 왜 하고 싶은 대로 하랬으면서 나중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듯이 말해? 처음부터 원하는 걸 말해.’

‘어차피 내가 얘기해도 안 들어주잖아.’


모든 사소한 말다툼은 체력 고갈에서 비롯된다. 평소라면 둘 중 하나는 그러려니 너그럽게 넘어갈 일에 날을 세운다면 생각이나 배려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지쳤다는 증거다. 넷째 날, 우리는 느지막이 일어나 단골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슬렁슬렁 걸어서 근처 공원에 들러 멍하니 벤치에 앉아 새를 구경하다가,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서 돌아왔다. 여행 중일지라도 하루쯤 쉼이 필요하다.


테이크아웃한 플라스틱 아이스 롱블랙 잔에 물방울이 맺히고, 걸어오느라 찝찝했던 땀이 천천히 식자 우리는 차분해졌다. 오늘은 각자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드디어 캐리어에 바리바리 챙겨 온 책더미에서 한 권 집어 올릴 여유가 생겼다.


우리가 첫 숙소로 선택한 로즈버리(Rosebery)는 공항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동네다. 주기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엔진 소음에 깜짝 놀라지만, 이마저도 익숙해졌다. 안 들릴 때 오히려 아쉽다. 안쪽 마당을 경계로 호스트가 사는 본채, 우리가 잠시 머무는 게스트 공간으로 나뉜다. 로즈버리에 있는 집들은 대부분 단층, 혹은 낮은 2층으로 된 단독주택이 대부분으로 집주인들은 앞마당에 아기자기한 정원을 가꾸고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넓은 뒷마당에 본인들의 진짜 욕망을 그린다. 비슷한 크기의 정원에도 집주인의 개성이 담겨있다. 칼같이 손질된 나무가 있는가 하면, 야생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나무가 있고, 배열도 제각각이다. 종류도 워낙 다양해서 지나갈 때마다 다른 향기가 난다.


우리가 머무는 곳은 야생에 가까운 정원이라고 볼 수 있다. 언제 가지를 친 건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나무가 마당 앞뒤로 서너 그루다. 특히 안쪽 마당이 더 넓은 덕에 침대에 누워 통창 너머를 바라보면 이곳에 발리인지 시드니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훈풍에 실려 오는 푸릇푸릇한 잔디향을 맡으며 페이지를 넘긴다. 고요를 음미한다.


오늘 저녁은 생선구이이다. 호주에서 가장 흔하다는 바라문디(baramundi)를 사 온 참이다. 얼마나 흔하면 피시 앤 칩스에 들어가는 생선도 이 바라문디란다. 첫날을 제외한 모든 저녁을 이 숙소에서 요리해서 차려 먹었다. 스테이크를 굽고, 파스타를 삶고, 샐러드를 만들고, 연어도 구워 먹었다.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요리를 자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첫날 들린 마트에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보고 반한 다음부터 매일 일정을 마트 장 보는 일로 마무리하고 있다.


방울토마토가 어찌나 신선하고 달콤하던지, 당 떨어지면 비상 초콜릿을 꺼내 먹듯 간식처럼 가방에 넣어 다녔다. 우리나라처럼 하우스 재배가 아니라 풍부한 햇살과 맑은 공기를 먹고 자란 덕에 품질이 좋고, 가격도 저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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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외식 물가가 비싼 편이다. 아무래도 인건비가 높은 편이라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한 끼만 사 먹어도 장 두 번 볼 가격이 깨진다. 그렇다고 맛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여행지에 와도 우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가성비와 품질을 따진다.


오늘 저녁은 담백한 바라문디 스테이크와 신선한 루꼴라와 토마토 샐러드다. 여기에 낮에 다녀온 오페라하우스를 곁들였다. 한국에서는 예능을 틀어놓고 밥을 먹던 우리였다.

“오늘 공연을 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필 비시즌 기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발레나 클래식 콘서트를 했더라면 망설임 없이 표를 끊었을 텐데 시간도, 공연도 애매했다. 아쉬운 대로 내부 투어를 예약했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운영하는 한국인 내부 가이드 투어가 있었다.


마지막 타임으로 예약해서 기다리는데 엄마 또래의 인상 좋은 가이드분이 다가오셨다.

“오늘은 두 분만 예약을 해주셨어요. 괜찮으시면 지금부터 가실까요?”

운 좋게 프라이빗 투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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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홀에는 우리 셋뿐이었다. 커다란 공간에서 뱉는 말이 밖으로 퍼지지 않고 다시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잠시 앉아 정면을 바라보며 공연 날을 상상해 본다.

'그때는 내 안으로 음악이 흘러 들어오겠지. 얼마나 황홀할까.'

기대감으로 들뜬 관객들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튜닝을 한다. 아직 들어오지 않고 로비에서 유리창 너머로 하버 브리지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오페라하우스에서는 대중 가수도 공연하고, 서커스 공연도 열리고, 아이들 학예회를 위해서도 대관한다는 이야기에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이런 공간을 누구나 예술을 향유하고 무대를 경험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는 가치관이 참 멋지다.


“유리도 프랑스에서 공수해 왔다는 게 참 대단해.”
“장인정신이지. 실루엣이 비치지 않도록 사선으로 설치했다잖아.”
“공연 전에 바다랑 다리를 보면 감정이 더 풍부해지겠어.”
“아무렴, 인터미션 때 화장실 가는 길도 작품이잖아.”
“다음에는 우리 꼭 저기서 공연 보자.”


푸짐하게 차린 시드니의 저녁상을 천천히 비워가며 낮에 본 오페라 하우스, 시드니 대학교, 거리의 풍경을 나눈다.


“왜 시드니가 좋다는지 알 것 같아. 맑은 하늘에 진한 햇살, 여유로워 보여. 모든 게.”
“하긴 요즘에 한국에서 이런 날씨 보려면 가을 몇 주가 전부잖아.”


여유로운 삶을 꿈꾸지만, 나를 포함한 내 주변 누구도 여유롭게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없다. 호주 거리에는 건물보다 높은 가로수가 무성하고, 한 정거장만 가도 푸른 잔디에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다닌다. 사람들은 돗자리를 펴고 누워 한가롭게 책을 읽고, 피크닉을 즐긴다. 마음속 격랑을 잠재우는 최상의 방법은 자연 속에서 보내는 하루라던데 시드니 사람들은 매일이 자연이다.


저녁을 다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여덟 시, 시드니의 하늘도 어두컴컴해진다. 커다란 나무도 실루엣만 언뜻 보인다. 아쉽지만, 창문을 닫을 시간이다. 장소만 바뀌었지 삶의 장면은 비슷하다. 다만 시드니의 공기는 조금 더 느리고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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