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드니 여행기2
시드니 도착 3일째, 퀭한 눈을 비비며 일출을 맞았다. 전날 자정 무렵 벽을 긁는 기분 나쁜 소리에 잠이 깨버린 탓이다. 분명 아주 조그마한 발에 달린 섬세한 발톱이, 아, 그러니까 쥐새끼가 우리 숙소 벽을 긁는 소리였다. 그것도 머리맡에서. 주먹으로 벽을 쿵쿵 쳐서 도망치게 만들고 싶었으나 이 쥐는 이미 면역이 생겼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찜찜함에 도저히 다시 잠들 수 없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전날 주말 글리브(Glebe) 빈티지 마켓에서 오페라하우스 투어까지 강행한 탓에 피곤으로 절어있었지만, 언제 쥐가 내 얼굴로 튀어 오를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버렸다.
“커피, 커피 수혈이 필요해.”
“계획이고 뭐고 우리 거기부터 가자!”
여행지에서 우리는 부지런해진다. 한국 부엉이조차 아침형 조류가 되어 날개를 활짝 펴고 비행할 게 틀림없다. 유독 일찍 시작하는 호주 아침에 맞춰 새벽같이 준비를 마치고 아침 8시에 ‘거기’를 먼저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처음 시드니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은 행복한 쿼카도, 본다이비치도 아니었다. 내겐 호주의 커피 문화가 넘버원이었다. 한국인 관점에서 오후 2, 3시면 문을 닫는 카페는 이상한 곳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모두가 아메리카노와 라테라고 부르는 커피를 롱블랙과 화이트 커피라고 부르는 곳. 얼마나 자부심이 크길래 명칭마저 다른 거지?
한적한 동네에는 동네 사람들이 자주 찾는 카페가 있기 마련이다. 숙소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큰길이 나오고, 코너에 작은 카페가 있다. 실내에는 테이블이 3개뿐이지만, 밖으로 대여섯 개의 철제 테이블과 의자가 나와 있고, 개를 산책시키는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린다.
우연히 카페를 찾은 첫날, 야외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살펴보는데 조금 이상하다.
KOREAN 바비큐 소스? 김치가 들어간 샌드위치?
‘분명 동네 사람 대상인데, 이곳은 유학생이나 교민이 있을 법한 동네도 아닌데...’ 의아한 마음이 들지만 서둘러 “um.. can I have a long black ~ ” 주문하려다 상대방이 풍기는 익숙한 분위기에 멈칫.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상대도 놀란 듯 물었다.
“혹시 한국 분이세요? 이 동네에 한국 분들 잘 안 계시는데.”
구글 평점 5점을 믿고 찾아간 곳은 한국 사람이 일하는 카페였다. 베스트 메뉴라는 슈니첼 샌드위치와 카푸치노, 아이스 롱블랙을 주문하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동네 사람이 된 것 같아 오금 뒤를 조이던 긴장이 풀렸다. 느긋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지나가는 개들의 견종을 맞춰보기도 한다. 이곳의 개들은 교육을 잘 받은 사립학교 학생처럼 보인다.
마침 음료가 나왔다. 한입 마시자마자 눈에서 하트가 뿅, 반해버렸다. 와인의 풍미를 풍기는 롱블랙, 부드럽고 고소한데 커피임을 잊지 않은 카푸치노. 곧이어 나온 치킨 슈니첼 샌드위치는 또 어떻고.
어쩜 오이가 이렇게 아삭하고 신선할 수 있지?
소스에 속재료 조합이 왜 이렇게 좋아?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나니 오후 2시에 문 닫는 이유를, 이들의 커피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여기 맨날 오자. 여기서 아침을 먹는 거야.”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조깅하고, 짐을 챙겨 나와서 여기서 커피에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고 그날을 시작하는 거야.
한국에서도 하지 않는 아침 조깅을 끼워 넣어 봤다. 맛있는 음식으로 속을 채우니 행복감이 차오르며 스몰토크에 자신감이 생겼다. 마침 지나가던 직원에게 뒷 테이블에서 시킨 메뉴는 무엇인지 물어봤다.
“사워크라우트 알지? 그거랑 치즈 넣고 구웠어. 시큼하고 고소한데 감칠맛이 돌아.”
“오호 맛있어 보이길래.”
“하하 하나 갖다 줄까?”
“노노, 내일 와서 먹을게.”
“그래 그럼 너희 내일 또 오는 거지? 기다린다?”
서로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우리는 약속을 지켰다. 시드니의 아침은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여드름 난다고 입에도 대지 않던 카푸치노를 매일 마셔댔다. 어차피 남자친구가 얼마 마시지도 않고 남긴 롱블랙은 언제나 내 차지니 하루 2잔 열심히 커피를 마셨다.
“쿼카가 왜 지구상에서 행복한 동물인지 알 것 같아.”
뜬금없는 주제 전환에 남자친구는 의아한 표정이다.
“그건 바로 커피가 맛있기 때문이야.”
카푸치노에 샌드위치를 먹어댔더니 이마에 여드름이 올라왔다.
얼굴에 여드름 나면 어때. 나는 쿼카처럼 행복한데.
4일 동안 먹은 메뉴를 읊어보자면 메뉴판을 그대로 올리는 게 보기 쉬울 정도다.
Double Smoked Ham & Sauerkraut Toasted Sandwich
Stracciatella
Schnitzel Sandwich
산미와 고소함이 공존하는 바삭한 토스트, 바질향이 좋은 직원 친구의 추천 샌드위치, 치킨과는 또 다른 정통 슈니첼 샌드위치까지.
마지막 날조차 20kg이 넘는 캐리어를 끌고, 커다란 배낭 2개를 메고 시드니의 시작이 되어버린 카페로 향했다. 왠지 아쉬운 마음에 쉽사리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샌드위치를 먹은 접시를 치우러 온 사장님에게 (우리 마음대로 그를 사장님으로 정해버렸다) ‘한국에 진출 안 하시냐고’ 나름 진지하게 물었는데 크게 웃으신다.
“이거 드세요.”
웃음 뒤에 서비스 쿠키가 나왔다. 굵은소금이 올라간 초콜릿 쿠키는 샌드위치나 커피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맛있다.
우리 여기 다시 올 수 있을까?
아쉬운 마음뿐이다. 한편으론 시드니에 우리만의 단골 가게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낯선 여행지에서도 나는 나만의 루틴을 만든다. 비록 아침 조깅에는 실패했지만, 내 입맛에 맞는 카페를 찾았고, 그곳에서 아침을 먹고,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그날 일정을 짠다. 즉흥적으로. 날씨에 따라 바닷가를 갈까, 아니면 시내를 거닐까,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지만, 어차피 계속해서 달라진다. 그저 완벽한 카푸치노를 홀짝거리며 하루를 상상하는 게 좋았다.
잔에 남은 마지막 커피 한 방울까지 비우고 느긋하게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떠난다. 지겨운 삶에서 탈출해 판타지를 꿈꾸며 10시간을 날아왔지만, 사람은 낯선 곳에서도 습관처럼 작은 일상을 만든다. 공항에서부터 이어지던 마음 한 구석 불안함이 숙소에 닿고, 단골 카페를 찾자 사라졌다.
우리는 이곳에서 단골 카페를 정했고, 매일 익숙한 얼굴에 인사하고, 따뜻한 롱블랙을 마신다. 비로소 여행자의 시드니 아침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