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를 먹는 앵무새

시드니 여행기 1

by 밤 비행이 좋아


시드니 길거리에는 앵무새가 날아다닌다. 대로변에는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고목들이 늘어서 있고, 꽃나무들은 계절을 자랑하듯 화려하게 피어있다. 시내에서 멀더라도 한적한 동네에 숙소를 잡기 잘했다. 단층짜리 아기자기한 집들이 죽 늘어서 있고, 이른 아침 조깅을 즐기는 동네 주민들이 간간이 보인다.


‘이거 올리브 나무 아니야?’

아무리 봐도 내가 집에서 키우다 수분 부족으로 죽인 올리브 나무가 분명하다. 호주도 올리브 생산국이었던가.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려는 찰나, 요란한 울음소리에 가려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저 앞에서 정체불명의 흰 새들이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쪼아대고 있었다. 심지어 나뭇가지에 매달려 사정없이 부리로 쪼아댄다.


‘저 새는 뭘까? 비둘기보다 큰데 이 동네 비둘기는 흰색인가?’

게다가 울음소리도 특이하다.

‘앗, 앵무새잖아!’

새하얀 앵무새 무리가 커다란 올리브 나무에서 떨어진 올리브 열매를 쪼아 먹는 중이었다. 신기한 장면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니 앵무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전깃줄에 옹기종기 늘어선 채 마치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울어댄다.


여행자는 처음 본 풍경으로 그 도시를 기억한다. 여행지를 검색하고 비행기표를 사며 설레던 순간을 지나 게이트 앞에 앉아 상상하던 여행지는 앵무새와 올리브 나무로 내게 각인되었다.

‘호주는 거대한 자연공원 같은 곳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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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타본 비행기지만 새삼 긴장이 몰려온다.

‘보잉 787이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지금 기내 방송으로 000 하라고 지시한 거야.’

괜히 긴장돼 묻지도 않은 정보를 늘어놓으며 아는 척을 했더니, 옆에 앉은 남자친구가 눈빛에 장난기를 담아 웬일로 이렇게 말이 많냐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밤 비행이라 다행이었다. 잔뜩 들고 간 책을 펼칠 새도 없이 바로 곯아떨어졌다.


15분 연착된 비행기는 오히려 예정 도착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시드니 국제공항에 닿았다. 비자도, 입국심사도 유니폼으로 대체되던 시절 누구보다 빠르게 캐리어를 끌고 통과하던 문을 이제 어떤 짐을 가져왔는지 긴장한 마음으로 설명하고 검사받아야 했다.

“해열제랑 진통제 가져왔어요.”
“당신이 먹을 약인가요?”
“그럼요. 제 거예요.”
“저기 6번으로 가세요.”


발랄한 마약 탐지견이 다가와 캐리어에 코를 박고 킁킁거린다. 괜히 ‘내 약’이라고 강조한 게 수상해 보였을까, 기다림 끝에 마약 탐지견의 승인을 받고 나서야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출국장은 끈적였다. 이미 한 차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우리처럼 늦어지는 이들을 기다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공항은 한산했다. 한국에서 입고 온 그대로 도착한 늦여름 시드니는 후끈거렸고, 이내 겨드랑이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우버를 겨우 잡아 공항에서 10분 떨어진 호젓한 동네로 향했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우버는 유난히 비싸다. 예약한 에어비엔비 숙소 대문 앞에 도착하자 얇았던 빗방울이 기다란 빗줄기가 되어 우리의 겨울 잠바를 적셨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여행자가 되었으니까.


Nadia는 유쾌한 할머니였다. TV쇼에서만 듣던 호주식 발음으로 쾌활하게 말을 건넸다. 마치 알고 지내던 이웃 주민처럼 어제 깨진 앞니를 보여주며 주말이라 아직 이 모양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는 흔쾌히 커다란 짐을 체크인 시간 전에 맡아주었다. 마침 비가 그쳤고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Nadia의 추천을 받은 동네 마트를 향해 걸었다. 흐리지만 쾌청한 공기, 수분을 잔뜩 머금어 진한 녹색빛을 띠는 커다란 나무들, 왼쪽으로 다니는 낯선 호주 차. 믿기지 않지만 낯선 곳을 여행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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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이 알려준 동네 마켓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쇼핑, 레스토랑, 카페가 밀집해 있었다. 커다란 공원을 지나 우아하게 걷는 아이비스 여러 마리를 동네 주민처럼 마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연기념물이라던데 이곳에선 그냥 동네 비둘기 취급이다. 15분 정도 걷자 카페나 음식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워라밸을 추구하는 호주의 악명 높은 서비스 문화를 미리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무조건 식사를 마쳐야 했다. 대충 둘러보고 피자를 먹기로 했다.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빵은 쫄깃했고, 산미 가득한 토마토소스에 리코타 치즈와 살라미, 버섯의 풍미가 훌륭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에어비엔비를 옮길 때마다 집주인에게 추천받은 식당은 늘 이탈리안 식당과 젤라또 가게였다. 게다가 맛도 꽤나 훌륭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호주에는 이탈리아계 인구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동네마다 괜찮은 이탈리안 식당과 젤라또 가게가 하나씩은 있었다. 여유롭게 피자를 먹고, 바로 옆에 있는 마트에서 물과 주전부리를 사고 나와 앉아서 쉬다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저 멀리 자판기에 가득 들어 있는 오렌지는 유독 샛노랗고 탱탱해 보였고 (만질 수는 없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자판기 주스를 마시는 릴스를 본 것 같았다. 강하게 호기심이 일었다. 약 7달러.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으나 어차피 여행지의 나는 한국에서의 나와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달콤한 한 잔에 빠져 지나가는 호주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자판기 앞에서 열렬하게 오렌지 깎고, 짜는 장면을 촬영했다. 오렌지 주스는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생각보다 상큼한 산미가 없어 실망했다가, 눈앞에서 목격한 인스타그램 속 하트 세례의 주인공을 직접 경험했다는 생각이 더해져 산미가 더해졌다.


아까 걸어오다가 본 젤라또 집에서 찐득한 피스타치오, 초콜릿 젤라또를 먹으며 앞으로 4일간 나의 집이 될 곳을 향해 걸어갔다. 떠나기 전 본 시드니 날씨가 일주일 내내 흐림에 비소식뿐이라 오랜만에 떠난 여행이 엉망이 될까 속상했지만 어쩐지 다음날 비가 와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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