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단 기간에 낯선 도시, 낯선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발악하는 외노자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저녁 9시, 10시에 침대에 누워 새벽 5시면 눈이 저절로 떠지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지금이 나에겐 새벽인 셈이다. 따라서 다음 날이면 이불킥일 게 분명한 생각들을 끄적거려도 괜찮을 것 같다.
한 줄로 요약해 본다면 나는 지금 외로움과 지루함에 발버둥 치며 미쳐버리기 딱 10초 전이다. 차라리 미니멈 레스트만 받고 계속 비행하고 싶을 지경이다.
*미니멈 레스트: 전 비행과 다음 비행 사이에 갖는 최소 12시간 휴식시간
(회사와 크루 모두가 지켜야 하는 의무다)
* 혹시라도 라마단 기간에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국교가 이슬람교는 아닌지, 금식(fasting) 중인지 자세히 알아보자! 무턱대고 비행기표를 끊었다가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암스테르담을 마지막으로 테헤란(이란), 소피아(불가리아) 턴어라운드를 다녀왔고 비엔나 비행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취소됐다. 따라서 2일 오프 뒤에 원하지 않았던 3일 스탠바이로 총 5일째 계속 도하에 체류 중이다.
카타르는 현재 라마단이다. 가뜩이나 사람 없는 거리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사실 개미도 태워버릴 태양과 더위에 개미조차 살길 찾아 진작 떠났을게 분명하다. 집에서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금은 방안에 감금된 거나 다름없다. 라마단이란 이슬람력으로 아홉째 달을 의미하며 약 한 달간 금식해야 한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길거리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가 금지되며 모든 카페, 레스토랑, 쇼핑몰 등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는 시설은 문을 닫는다. 금식하는 걸 파스팅(fasting)한다고 한다. 지금 나라 전체가 현재 파스팅 중이다. 해가 진 후에야 비로소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고 하루 종일 굶었던 사람들도 마시고, 먹기 시작한다. 즉, 어디 외출하는 게 불가능하다. 내가 자주 가는 카페 999도 해 진 후 ~ 8시까지만 Iftar 뷔페를 운영한다. 한 달 동안 카페가 아니라 일시적인 뷔페인 셈이다. 카페도 못 가고, 얘기할 사람도 없고 이러다 정말 미치는 걸까 싶을 정도다.
한국에 있을 때도 쉬는 날조차 집에 못 있고 밖을 싸돌아 다니던 나였으니 말 다했다.
‘어차피 난 무슬림도 아니고 비행 중일 텐데 무슨 상관이야’ 싶었는데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 헛웃음이 나온다. 여기에 살고 있는 이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적응해야만 한다. 비행하는 크루들 중에도 무슬림 비중이 꽤 되다 보니 브리핑 룸에서는 새로운 질문이 추가됐다. ‘지금 금식하는 사람?(Fasting)’
9~10시간 장거리 비행이라도 종교적 신념에 따라 물 한 모금조차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고 눈에 핏줄이 선채로 일하는 크루들을 보면서 안쓰럽기보다 신기함이 앞선다. 평생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새로운 영역이다. 라마단 기간 중 기내 서비스도 바뀐다. 비즈니스 클라스에서는 대추(date) 등이 추가되며 금식하는 승객을 위해 기내식을 빼놨다가 해 지는 시각에 맞춰 서빙한다. 기내 방송으로 현지 시각을 계산해 언제가 해 지는 시각인지 알리기도 한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생산적인 인간이야.
속으로 되뇌며 나름의 생존 방법을 구축해 놨다.
라마단을 이겨내는 법
1. 유쾌한 책을 읽는다.
소설책이 아니라 산문집을 읽어야 한다. 갈등의 전개, 위기, 절정 따위는 없는 누군가가 그린 유쾌한 이야기를 접해야 한다. 가령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같은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 두 작가와 고양이 4마리의 관계성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따뜻해진다. 부러움을 넘어서서 질투심까지 느껴질 정도다. 언젠가 나도 그녀들 같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일까를 생각하다 보면 두세 시간은 거뜬하다.
2. 고전 음악을 듣는다.
책발이 떨어지면 80년 대 한국 가요나 일본 가요를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 시대 감수성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1시간이 후딱 간다. 나는 원래 노래방이라면 질색인 사람인지라 듣는 건 좋아해도 부르는 건 딱 사양이었는데 요즘은 마이크를 구매할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최근에 꽂힌 노래는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과 ZARD 의 負けないで(지지 말아요)다. 지금도 목청껏 따라 부르다 울컥해서 펜을 들었다.
플랫 메이트는 지금쯤 워싱턴 상공을 날고 있을 테니 이 정도 고성방가쯤은 괜찮다.
3. 넷플릭스 정주행에 도전한다.
4. 그동안의 모아 온 전리품을 보고 기뻐하기도 한다.
5. 쟁여놓은 과자를 먹던가 굳이 몸을 움직여 뭐라도 대충 만들어 먹는다.
오늘도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틀어놓고 한국에서 쟁여온 호떡믹스를 오픈해서 성공적으로 호떡을 만들어 우적우적 씹으면서 그동안 모은 각국의 동전이나 기념 자석 등을 들춰보기도 한다. 사실상 그 무엇에도 집중하지 않고 시간을 때우는 셈이다.
문득 트레이닝 기간 동안 인스트럭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흰 1년 동안 아주 많이 변할 거야. 아마 아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어’ 그땐, 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걸 보게 되고 경험할 텐데 시야도 넓어지고 생각의 폭도 달라지겠지. 발전하는 방향으로만 생각했었다. 근데 그 한 마디에는 많은 게 담겨있었다.
혼자가 익숙해지는 것이다. 혼자서 뭐든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성장하는 한편 굳이 옆에 누가 없어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들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혼자보다는 둘이 좋고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라마단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는 데 급급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만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겠지. 시간에 맡기련다.
글 쓰다가 책 읽고 과자 먹으면서 영화도 봤다가(심지어 과자도 떨어졌다. 근데 사러 갈 수가 없다.) 모아놓은 자석이나 머그컵을 굳이 꺼내서 뒤적거려도 시간이 참 천천히 간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혹은 반경 300M 안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정도냐고? 틴더 앱을 깔고 근방 1km 이내 '나 한가해요' 찾기 일보직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