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에 빠져 있는 누군가에게
2019년이 지났다. 그리고 2020년의 새해 아침이 밝았다.
이미 새해로 넘어와서 첫 달의 하반기에 접어들고 있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걷기 전에 2019년부터 잔상에 남아 마음을 어지럽혔던 영화를 정리함으로서 2019년의 마침표를 찍어보려고 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어서는 현재를 살 수 없으니까.
2019년부터 시작한 소소한 행동이 있는데 그건 시청한 영화를 리스트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기록을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영화를 한참 보다가 이미 봤던 영화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고 내가 일 년에 얼마나 많은 영화를 소비하는지가 궁금하기도 했고 마음을 붙잡에 놓는 영화 속 한 장면이나 캐릭터의 대사 한 줄, 스쳐가는 배경 등이 막상 영화가 끝나면 금방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따로 보관을 해놓고 싶었다.
2019년 동안 나를 웃고 울린 영화는 참 많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깊은 여운을 주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영화는 ‘돈 워리’ 였다.
사실 영화 초반에는 많이 졸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친구와 맥주를 한잔한 상태였고 사전에 영화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 그냥 관람하러 간 것이라 기대 또한 없는 상태였다. 영화가 상영되고 나서는 집중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몇 번이나 스크린을 향해 인사를 해댔는지 모른다. 포기할까 싶을 때쯤 영화는 천천히 가슴을 파고 들어왔고 훅하며 깊숙이 어딘가를 찔렀다. 영화는 비단 캐릭터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삶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영화 돈워리는 실존했던 미국 유명 카투니스트인 존 캘러한의 실제 삶을 풀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존 캘러한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존 캘러한은 열세살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세상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매일 매일 술에 절어 살며 방탕한 삶을 이어갔다. 21살이 된 캘러한은 파티에서 만난 덱스터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며 여러 곳에서 술을 마셨고, 다음 장소로 이동 하던 중 만취한 덱스터는 결국 교통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이로 인해 존 캘러핸은 하반신 마비가 되어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 하는 삶을 판정받는다. 절망에 빠진 존은 더욱 술에 의존하게 됐고 후에 도니가 이끄는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진실된 나를 마주하고 책임을 가지는 것]
존 캘러한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빨간 머리. 학교 교사.’
그가 생모에 대해 알고 있는 세 가지 사실.
‘나를 원치 않았어요.’
존 캘러한은 태어나면서부터 버림을 경험했다.
생모에게 버림받은 존은 보호소를 통해 한 가정에 입양되었다. 그런 그는 입양아로서 또래 아이들에게서 소외감을 느꼈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버림 받았다는 사실과 누구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수단으로 술을 찾았다.
모든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물론 영화의 캘러한처럼 생모에게 버림받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극적인 고통을 경험하지는 않아도 다들 저마다 크고 작은 생체기를 가슴에 안고 살고 있을 것이다. 하얀 도화지처럼 맑았던 마음이 얼룩 한 점 없이 보존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간혹 아픔에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자존심을 상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자신을 한없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포장해 가며 자신의 상처를, 때로는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을 끌어안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외부 안에 숨겨진 내부를 마주하는 순간 심하게 썩어있는 모습을 마주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외부에 대한 자부심은 있을지 모르나 나에 대한 ‘존중’이 없다. 문제를 방관 하면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학 행위를 허락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상처를 받을까? 우리는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에게서 받기도 한다. 그 당시에는 상처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그것이 상처였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 이유는 제각각이다. 이유도 다양하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신념과 믿음, 좋고 나쁨의 기준을 만들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그 틀 안에 모든 사람들을 집어넣어 정의를 하고 판단을 하며 때로는 강요도 한다. 물론 자신도 예외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사실 동시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느낀다. 우리는 사회에서 꿈꾸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한다. 우리는 항상 승리자가 되고 싶고 강해지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개인적인 꿈을 표출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꿈이 받아 들여 지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사회에서 만든 환상이다.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만들어진 신념과 믿음의 집합체이다. 우리는 환상 속에서 살며 서로의 환상 안에서 상처를 주며 살아간다.
예를 들어 오렌지가 바나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항상 오렌지라고 생각하던 그가 자고 일어나니 바나나가 되었다. 삶은 불행해진다. 혹은 다른 바나나에게 지속적으로 오렌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를 하며 상처를 주기도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바나나인 자신을 혐오하고 그 증오를 누군가에게 쏟아 내야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처를 치료하려면 우선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 내리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기연민의 감정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험난한 삶 속에서 우리는 이탈의 충동을 종종 느끼기도 한다.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사는 삶. 세상에 나를 내맡기며 선택을 선택하지 않는 삶. 그렇게 자신을 ‘부정’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삶에 대한 충동.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종교에서는 이걸 자유의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캘러한이 정신이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기고 한 것도 선택이며 술에 취한 사람의 차를 탄 것도 선택이었다. 그 선택의 결과는 교통사고로 인한 하반신마비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매일 내가 한 과거의 선택의 결과를 마주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현재는 과거 선택의 결과들이니 미래는 현재 선택의 결과를 나타내겠다.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선택을 할 의지는 마비가 된다. 하지만 선택의 부정도 침묵도 결국은 선택이다.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선 현재의 나를 인정하고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용서 – 나를 상처로부터 분리하다.]
자신을 자기연민에 빠져서 스스로를 부정해 왔다는 것을 인정한 캘러한은 도니로부터 자신이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그리고 반대로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한다.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상처로 인한 분노를 쏟아내라고 하지만 사실 그 효과는 일시적이다. 표출한 그 순간은 모든 감정이 해방되는 것 같지만 다시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는 순간 스멀스멀 올라오는 증오는 없앨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그 감정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용서는 상처의 힐링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사항이다. 하지만 용서란 늘 그렇듯, 너무 어렵다.
보통 용서를 떠올리면 누군가가 사과를 전하고 그 사과의 진심을 헤아린 후 상대방은 용서를 한다.
하지만 사과를 받지 못하는 상대방을 어떻게 하나? 영원히 증오하며 분노를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혹은 문제의 잘못점도 모르고 이해할 생각이 없는 상대라면? 그것도 아니면 볼 수없거나 말할 수 없는 상대라면?
아직 확실히 용서의 프로세스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일단 용서의 시초는 이거 일 것 같다. ‘나’와 ‘사건’을 분리시키는 것. 그러니까 그 사건이, 그 상처가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
예전 회사에서 유독 나를 힘들게 하던 진상 클라이언트가 있었다. 매일 툭하면 전화 와서 없는 내용까지 만들어 가며 괴롭혔는데 그 내용이 어찌나 괴씸한지 매일 저녁 자기 전에 괴롭힐 거리를 구상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전화는 업무 중에도 간혹 있었고 그래서 그냥 넘겨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평상시와 다름 없는 평범한 날이었는데 독일 본사에서 총책임자가 내려온 날이었다. 모든 직원들은 한 데시벨 더 높여가면서 열심히 부지런함을 떨어댈 때 하필 눈치도 없게 진상이 전화를 해왔다. 전화를 받았고 나는 막 그 총책임자와 인사를 하지 직전이었다. 전화기 넘어로 들려오는 육두문자는 그날따라 강렬했고 나는 그 순간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총책임자와 눈을 맞추고 눈물 두 줄을 흘려버린 것이다. 당황한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는 쪽팔려서 화장실로 뛰어 갔다. 웃지 말라고 하면 더 웃긴 것처럼 울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서러워서 눈물이 주체가 안됐다. 참 씁쓸했던 날들이다. 그때 총책임자가 조용히 나를 따로 불러서 해준 얘기가 있다. 그건 바로 ‘don’t take it personally’ 즉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종종 모든 문제를 모든 상처를 나 자신과 연결지어 생각한다. 모든 상황은 나 때문에 일어난 것 같고 나만 괴로운 것 같다. 그 생각은 점점 진화되서 ‘나’라를 존재가 괴로워지고 혐오 스러워지고 결국 스스로를 부정하는 단계까지 깊어지기도 한다.
캘러한은 캘러한이기 때문에 엄마가 버리지 않았다. 캘러한의 엄마의 환경이 혹은 자식을 버려도 된다는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연히 캘러한이었을 뿐이다. 나를 괴롭히던 진상은 자신이 구입한 제품의 문제점에 화가 나 있었고 그래서 그 회사에도 화가 나고 더 나아가 알 수 없는 그 자신의 개인사에 화가 나 있어서 그 분노를 전화를 받는 나에게 표출을 한 것이다. 엄연히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막상 육두문자가 전화기 넘어로 오고갈 때 제대로 이성을 갖추기는 힘들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는 화가 나서 울고 분노를 느껴도 가슴 깊이 상처로 남길 이유는 없다.
‘나’라는 존재는 그 무엇에 의해 불려지고 쓰여지고 감정이 담겨져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과 상관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남들이 휘두르는 말들에, 행동에, 생각에 ‘나’의 의미를 찾고 나를 가둬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해는 그래서 진정한 ‘나를’ 찾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타인을 용서하고 나 자신도 용서를 해야 용서의 단계는 끝이 난다.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나의 배경을 이해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조용하게 덤덤히 나를 이해하고 연민을 느끼고 끌어안아주자.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던 믿음이나 신념은 버리자. 나를 사랑하는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더 이상 나 자신에게 ‘조건’을 달지 말자. 나 존재로도 사랑 받을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모든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