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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브 Sep 27. 2018

뉴욕에서의 5년, 그리고 기억에 남던 여름밤

매혹과 열망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맞은 젊은 계절 

*지난 8월,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서울의 한복판에 앉아있다가

녹아내리지 않기 위해 무작정 써 내려간 단상. 


여름을 그렇게 기다렸건만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숨이 막히는 후끈한 더위와 불쾌한 습기는 

마치 개봉만을 손꼽아 기대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지루하게 흘러가는 영화 같았다 (영화관은 시원하고 쾌적하기라도 하지!).  


광기 어린 폭염이 오히려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내가 여름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계기는 

예전에 뉴욕에 살던 시점부터였다. 


미드 타운 속 작은 쉼터 브라이언트 파크 


2년 전, 나는 인턴을 하던 회사에서 퇴근을 하고  

당시 살고 있던 이스트 빌리지 앞의 작은 공원에 나와 잠시 앉아있었다.

선선한 밤공기는 고요하면서도 어딘가 들떠있었고

한켠에서는 한 예술가가 첼로를 연주하고

다른 한켠에서는 복싱 연습을 하는 커플, 

그 외에는 간간히 배고픈 쥐들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음악과 낭만, 차분한 열기로 채워진 뉴욕의 여름밤이었다.


공원 밖에 지나가는 택시와 바쁜 사람들의 발소리가 

그 안까지는 미처 들리지 않았다.

잠시 동안 외부의 세계와 차단되어

그 순간을 온전히 만끽했었다. 

 

그때의 작은 사건을 기점으로 뉴욕의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산책과 사색, 그리고 온갖 파티와 탐험, 새로운 만남으로 가득 찼던.

이미지 출처: unsplash


경쟁적으로 흘러가던 낮의 세상이 보랏빛 석양이 지면서 

다시 내 눈앞에서 새롭게 배열되기 시작했다. 


도시가 달빛에 잠길 때, 

세상은 반짝임으로 진동했다. 

반 고흐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때때로 밤이 낮보다 더 생생하고 풍부하게 채색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달빛 아래 우거진 나무와 빌딩 숲 속을

불나방처럼 정처 없이 쏘다니는 사람들.

칵테일을 마시며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끊임없는 웃음소리와 탄성이 감도는 파티장.


그 열기를 관조하듯 달빛은 사람들의 머리 위를 은은하게 떠다녔고

그 아래 부서지던 재즈 선율은 모든 것을 부드럽게 적셨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와 계절의 충돌은 

그 자체로 풍요로운 축제였다.

 

잠들지 않는 도시를 찾아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터질 것 같은 서로의 에너지를 포옹하며

젊음을 뉴욕의 밤처럼 아낌없이 불태우는 모습을 볼 때면,


그 거대한 도시를 움직이는 맥박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라는 질문에 두말할 것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뉴욕은 낭만적인 꿈과 피상적인 것이 부드럽게 대립하는 공간이었다. 

루프탑 바 한편에서는 금융계에 종사하는 뱅커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재단된 정장을 차려입고,

각종 수치와 세계 증시에 대해 논하고,

다른 한켠에서는 예술가들이 맥주잔을 부딪히며 낡은 책을 들고

보헤미안적인 가치관을 설파했다. 



다양한 것들이 충돌하는 이곳에서

매일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순간순간을 만끽하는 일은 

그 당시 나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단 하루도 똑같지 않았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던 순간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을 음미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던 순간들. 


페리를 타고 허드슨 강 사이를 항해할 때면

멀리서 파도를 비추는 등대마냥 작지만 환하게 서있던 

자유의 여신상.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거리공연을 하는 뮤지션들. 

야간개장을 한 미술관과 야외에 누워 밤하늘 아래서 보았던 영화들.  


빛을 발산하며 손만 뻗으면 깨져 버릴 것 같은 유리로 이루어진
웅장한 건물들 사이사이에 숨겨진,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골목길에는  

앤디 워홀이 있었고, 시나트라와 우디 앨런이 있었다.



마법과도 같은 문학적 표현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작가 폴 오스터는

그의 소설 '뉴욕 3부작', '유리의 도시'에서 뉴욕을 이렇게 묘사한다.   

뉴욕은 무진장한 공간, 
끝없이 걸을 수 있는 미궁이었다. 
아무리 멀리까지 걸어도, 
근처에 있는 구역과 거리들을 아무리 잘 알게 되어도, 
그 도시는 언제나 그에게 길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 주었다. 


길을 잃었기에 우리의 상상을 더욱 자극했던 장소와 

한없이 열띤 숨소리로 우리를 보듬었던 계절. 


몇 주전 일기장에 써 내려갔던 단상을 다시 읽으며

서늘해진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시작점 사이에 선 이 순간,  

막상 끔찍하게 더웠지만

떠내 보려고 하니 아쉬운 

애증이 섞인 마음에 이 글을 올린다. 


다음 여름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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