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관장님 이야기

그냥 내 인도이야기

by 영어하는 소시지

닥치는 대로 통역일을 했다.

몰딩기계, 대형 크레인, 텍스타일등의 중소기업에서 오신 과장님 부장님들을 도왔다.

영화제 때문에 인도로 오신 영화감독님 두 분도 계셨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영화를 찍으신 분들이셨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오신 방송국 PD님도 계셨다.

너무 많은 분들을 만나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제품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 가며 비즈니스가 잘 되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드렸다.

나 스스로의 영역이 넓어지고 역량이 커지는 일이기도 했다.

한국 오면 연락 달라며 연락처랑 명함들도 정말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

시절의 인연들이었던 것 같다.



인도에서 비즈니스 통역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친화력이다.

인도사람들이 통역을 데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고

한국 측에서 통역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는 도우러 왔다는 마음이 잘 전달되는 게 중요하다.

인도를 경험하며 살고 있고, 또한 이 분야에서 경력이 많으니

여러분들의 입장이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충분히 잘 설명해 드릴 거라는 진심은 인도분들의 마음을 연다.


비즈니스란 결국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거래를 약속하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인 것 같았다.

연인관계와 다를 게 없다.


독일사람들의 말이 신용이라면

인도사람들과 말로 하는 약속은 언제든 어그러질 수 있다.

증거를 남겨야 하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야 한다.

그럼에도 미팅이 어그러질 수 있다.

인도분의 우선순위가 잠깐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기다림이 길뿐이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속도가 느리지만 일어난다.

다만 문화적 갭으로 신뢰가 어그러질 수 있는 부분을

메우려고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인도분들의 여유 있는 비즈니스 문화는 한국에서 이해받지 못할 수 있는

문화라를 것을 설명해 드린다.

신뢰를 쌓는데 오랜 기간을 두고 봐야 하는 남인도분들의 특성상

종종거리게 되는 건 한국 쪽이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거래가 성사가 되면 그다음부터는 큰 무리 없이 갔던 것 같다.

서로의 회사에 왔다 갔다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문화를 떠나 좋은 분들과 좋은 분들의 만남은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경험치를 쌓고 있는 와중, 관장님께서 제안을 하셨다.

정직원으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관장님은 브라질 코스 타리까 등 위험지역을 많이 다녀보신 분이어서

사람들을 다루는 내공이 높으셨다.

우선 인도사람들의 늦는 습관, 무역관에서 일하는 친구들에게는 절대 없었다.

잘못된 부분은 남녀 가리지 않고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신다.

또한 무역관이 해외에서는 대사관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거라고 강조하시며

엄격한 규율과 잣대로 일을 제 대 로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셨다.


관장님이 출근하시고 방에 들어가시면 늘

" 미스오~~ " 하고 부르셨다.


그럼 난 내 방에서 믹스커피를 끓여다 드린다.

실질인 회사생활은 처음 하는 늦깎이 미쓰오에게

관장님은 업무 외에도 몸가짐, 마음가짐등을 늘 말씀해 주셨다.


인도에 있는 한국기업이 다 모이는 세미나가 열리던 어느 날.

인도 고위 관리과 와서, 인도 경제 관련된 연설이 하는 부분이 있었다.

거기에서 동시통역을 하라고 하셨다.

이게 뭔 일인지, 무대 공포증이 있는데..

호텔에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게나 많은 한국분들이 첸나이에 있는 줄 몰랐다.

첸나이는 H대기업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1,2,3차 벤더까지 나와있었다.

그 당시 첸나이에 있던 20대 여자는 나 혼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리가 후들후들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통역은 끝났고, 다음 순서가 진행이 되었다.

실력으로 한 것 같진 않고 깡으로 한 듯하다.

지역사회에 코트라에서 일하는 미쓰오가 공개적으로 소개되었다.


코트라에서는 1년에 한 번 한국으로 바이어를 전시회로 보낸다.

대부분 3월에 열리는 대구 텍스타일 전시회가 인기가 많다.

안내자 역할로 동행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계속 전시회에 참여해야 해서 휴가차 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한국이라니 ㅜ ㅜ


갈 날짜가 다가왔는데,

한국에서 쓸 비용을 주신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었다.

초조함이 몰려왔다.


“관장님, 한국에서 쓸 수 있는 비용은 언제쯤…”


그 순간이었다.



“야! 내가 그 돈 안 줄까 봐 그래?”


달라를 서랍에서 꺼내 던지셨다.

부끄러움 이상의 수치, 모멸감, 치욕감이 몰려왔고,

방에 들어가서 내 신세를 한탄하며 한없이 울었다.


인생의 사건은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따라

무서운 괴물 같은 얼굴로 다가오기도, 코미디로 다가오기도 한다.

다만 상처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이벤트 자체가 아닌 '나' 때문이다.


집이 부도가 났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인도라는 지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는 마음이 가난했고,

그 사건을 감당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당시 어린아이 같던 내 정신에 '팍' 들어와 꽂혔다.

상처로..

그뿐이다.

관장님은 상사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거다.

좀 과격한 방식이었지만,

그 정도는 아프지만 꿀꺽 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난 그 상처를 오래 간직하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 들여다보았다.

상처를 간직하는 사람은 나였다.


그렇지만 결국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도 나 인것 같다.

그래서 '글'이라는 장작으로 태우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비워 진 서랍이, 다른것들로 채워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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