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인간의 힘을 얕보지 말라
실존주의자 알베르 까뮈는 인간에게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자살'이라고 단언한다. 자살은 인생이라는 것이 힘들게 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평생 갈구하게 되는 운명인 셈이다. 하지만 까뮈는 이러한 인간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라는 것이 신의 장난, 마치 한 편의 부조리한 연극이라고 얘기한다. 즉 삶의 의미라는 것은 허위이며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삶에 의미는 없으니 찾지 마라. 까뮈는 마침내 삶에 의미가 있다거나 없다는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삶 자체의 부조리함을 인식해야 하고 그거에 굴복해 무의미로 무화되어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반항하고 저항하라는 말로 끝맺는다.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까뮈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를 평생 의미없이 매번 굴러 떨어지는 돌을 산 꼭대기로 올리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부조리를 정면으로 반항하는 절대 긍정의 존재로 승화시킨다. 시지프는 웃고 있을 거라는 거다. 이러한 삶에 대한 해석은 사르트르의 그 해석과는 미묘하게 달라서 서로 반목했는 지도 모르겠지만, 마주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웃고 있는 시지프를 긍정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같은 결론으로 귀결하게 된다.
"끝까지 발버둥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허위라도 좋을) 살아갈 의미와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
수험생활에 문득 그런 생활이 들었다. 합격을 보장해주지 않는 시험인데도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공부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우리는 시지프가 아니기 때문에 '반복되는 매일의 최선'은 결국 어떠한 희망으로 인해 유지된다. 수험생활이 그 자체로 만족스럽고 기쁨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 자명하다. 수험은 모든 활동 중에 가장 그런 것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합격이라는 미래의 보상을 위해 감내하는 현재의 고난인 것이다. 합격을 목표로 하지 않는 수험은 없다. 합격하지 못해서 수험생활이 길어질까봐 두려운 사람은 많아도, 합격해서 수험생활이 끝날까봐 두려운 사람은 없다.
여기서 논조의 포인트는 합격하지 못하는 공부는 결국 의미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결국 이별해버린 연애가 실패와 낭비의 서사라는 관점에 동의할 수 없는 것처럼. 논조의 포인트는 '반복되는 매일의 최선'을 가능케 하는 그 근원의 힘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합격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고 불운한 일이다. 그것을 결코 폄하하고싶지 않다. 진짜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가 없을 때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가.
바로 희망이다. '합격하리라는 희망', 내 모든 고생이 보답받을 것이라는 희망이 우리의 현재의 모든 고난의 수험생활을 견디고 유지시켜준다. 결국 수험생활의 동기는 카지노에서 잃은 돈을 전부 회수하기 위해 손절하지 못하는 도박 중독자와 같은 동기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의욕을 느낄 수 없다.
그럼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험생들은 결국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참된 희망을 가진 사람과 헛된 희망을 가진 사람으로. 참된 희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합격의 확률이 정비례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 면에서 운적 요소에 과도하게 운명을 내맡기는 도박 중독자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승리하리라 기대하고, 승부하며, 마침내 승리한다. 그러나 헛된 희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합격의 확률이 정비례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믿지 못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시험의 공정성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좀처럼 내가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나에 대한 오래토록 쌓여 온 불신. 그것을 증명하는 통제되지 않는 나 자신. 이어지는 타인과의 비교와 유발되는 열등감과 자책과 죄책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욕망의 탐닉. 그로 인한 일상의 붕괴. 악순환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수험생활은 도박 중독자가 예측 불가능한 자기 자신에게 거는 도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에는 합격 확률이 도박에서 돈을 벌 확률보다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하루종일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하루종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그 누구보다 합격에서 멀어지는 인간이 탄생한다. 그러니 더러는 자살해버리는 것이다. 잔인한 일이다.
그렇다. 수험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희망, 그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감이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순식간에 무기력과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니 모든 일을 잘 되게 하려면 결국에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자신감을 갖는 것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다. 공무원이 되기로 마음 먹었을 때, 5급을 볼지 7급을 볼지 9급을 볼지는 단순한 의욕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 스스로 오래토록 쌓아온 신뢰의 발현인 것이다. 그 신뢰에는 탄탄한 승리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자신감만큼 더 높은 고지와 더 높은 보상을 결단할 용기도 생기는 것이다. 거기에는 헛된 희망이 아니라 참된 희망이 있다. 그러니 이것은 결코 무모한 짓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자신감이라는 것을 매우 협소하게만 생각했다. 결국 수험생활이 나와 남의 경쟁이라면 자신감이라는 것은 나의 노력과 능력이 남보다 우월하리라는 나(자自)의 믿음(신信)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협소한 자신감은 결국 탁월한 인간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한 순간에 탁월한 인간으로 변할 수 없으므로 이런 식으로는 자신감을 얻기 어렵다. 그러니 자신감을 협소하게 생각하면 결국 자신감을 얻지 못한다. 그거야말로 근거 없는 자신감, 근자감이 되어버린다. 그런 자신감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그래서 다른 관점으로 자신감을 얻어야 한다. 어쨌든 자신감은 있어야 하니까. 이런 번뇌는 모두를 마침내 결국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근거에 기반한 자신감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의 자신감"
결국 이것밖에 남지 않는다. 나 자신이 한없이 약하다고 느껴지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도저히 어떤 경쟁에서 그 누구도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들지 않을 때, 모든 사유가 부정적으로만 작동할 때, 나는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으로 일어서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로 일어선다. 물론 결과는 남보다 우월해야하는 경쟁이지만, 과정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니까. 그러니 나의 최선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로 이 싸움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그러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반복되는 매일의 최선'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때 비로소 승리의 가능성도 열리는 것이다. 결과 앞에서 누가 더 운이 좋았는가, 재능이 있었는가, 노력을 했는가, 시간을 투입했는가, 고통을 더 받았는가를 논하는 것은 그 너머의 형이상학적인 일일 뿐이고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얘기하며 근대를 열었고 인간 이성과 사유를 존재의 절대 근거로 천명하였다. 나는 이 명제를 이렇게 바꿔보겠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