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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인 Dec 06. 2023

역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네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이 가시는 길을 살피었다. 그들은 각각 새로 가족을 꾸렸으므로, 배우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생겨난 열 두 명의 손주들도 함께 그 길을 살피었다.


가시는 길에는 18명의 직계 가족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과 또 그 가족의 가족들이 가시는 길을 살피었다. 나의 이종사촌의 이종사촌이 함께였고, 할머니의 사촌과 조카가 함께였고, 이모부의 형과 숙모의 언니가 함께였다.


가족들의 지인들도 가시는 길을 살피었다. 이모, 이모부, 삼촌, 숙모, 아버지, 어머니의 지인들이 함께였다. 고향 친구과 직장 동료, 다양한 인연들이 함께였다. 나의 친구들도 마음을 보내주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평생에 일구어 온 인연을 삼일 밤낮으로 인사로 맞이하며 인간의 존엄함에 대해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었다.


성인이 되어 직계 가족의 장례를 치른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어머니의 눈물도, 이모의 절규도, 삼촌의 오열도 그러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서 장모님을 어머니처럼 모시던 아버지도,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며 다양한 추억을 함께 했던 나도 슬픔을 감추기는 매우 어려웠다.


화장을 기다리는 동안에 유가족 대기실에서 가족들은 할머니의 역사를 가늠했다. 할머니의 부모님, 할머니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예순이 다되었는데도 할머니의 역사는 아직 다 발굴되지 못했는지, 삼촌과 이모들은 서로의 기억의 단편들을 모아서 떠난 어머니를 추억했다. 그 옆에서 얘기를 주워 듣는 나도 모든 것이 새로웠고 깊은 여운을 남겼다.


예전에 할머니에게 어린 시절을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머쓱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 좋은 일일지 가늠이 되지 않아 더 묻지 않았다. 할머니에게도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을 것이고 형제 자매가 있었을 것이고 산 넘고 강 건너 초등학교를 다니던 소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12살 때 625 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30년 전에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이북이 고향이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오빠는 아주 우수하셔서 경성제국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너무 우수하셔서 일본군에 잡혀갔고 그 길로 행방불명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고향과 시집 온 이야기 등 여러 얘기들이 파편으로 흩날리는데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모두 너무나도 귀중하게 느껴졌다.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이다'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시대가 너무 빠르게 변했는지 이제는 더이상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도서관이 되어버렸을지라도, 가볍게 입을 놀리기엔 한 명 한 명의 인간과 그 인간이 살아온 인생은 참으로 풍요롭고 충만하고 고귀하다. 그 고귀함을 필사적으로 힘 닫는 데까지 기리고 싶다. 인간으로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인간이다. 그렇기에 이 모든 장례 절차가 엄숙히 진행되는 것이다.


할머니가 생전에 부르던 노래가 허공에 울려퍼졌다. 자꾸 듣고싶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의 노랫가락이었다. 할머니는 이 노래를 어머니로부터,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았을지 모른다. 지켜야 할 전통 문화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었고, 그것이 제대로 보존되고 이어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결국 가족들은 그 노래를 이어 배우지 못했다. 그렇게 사라져간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천수를 누리고 호상이라 불리우는 죽음도 이러할 지언데, 갑작스런 죽음이나 불의의 사고, 전쟁과 같은 참상은 감히 그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자연은 무심히 아랑곳 하지 않고 무한히 수십 억의 생명을 낳고, 수십 억의 생명을 거둬간다. 그러니 태어나지 않았으면 죽을 일도 없었을 거라고 항변해도 역시나 살아가는 것은, 또 죽어가는 것은 다 저마다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절망의 한 가운데서도 희망이 있고 슬픔의 한 가운데서도 기쁨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죽음의 한 가운데서도 생명이 생겨나는 것이리라. 언젠가는 나의 부모님도, 나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자녀도 그 자녀의 자녀도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생은 계속되리라.


그저 부끄럽지 않게, 낳아준 생명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반듯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음에 소중한 사람을 잃고 글을 쓸 때는, 글 따위 쓸 여력이 결코 없을 것이기에, 미리 간신히 기록으로 남긴다.


할머니가 웃는 모습은 박명수를 꼭 닮았다.

그런 할머니의 웃음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모습으로 영원히 할머니를 추억할 것이다.


할머니 보고싶네요. 편히 쉬세요. 감사합니다.


202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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