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온 Nov 21. 2022

New York, 2017 - 2022.

나의 이야기.

H1-B 비자 결과가 나왔다. 나는 1차 로터리(Lottery)에서 떨어졌고, 9월 29일 나는 뉴욕과 작별한다.


비자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보다 당연히 될 거라는 마음이 컸다. 비자가 된 후 하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고 그것들을 할 생각에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지, 비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비자는 지난 5년의 시간을 재고해 보면, 응당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내 몸은 많이 망가졌다. (대미지가 쌓이던 것들이 터졌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비자 응모 결과를 기다리던 3-4월은 나에게 지옥이었다. 당장 몇 개월 뒤 내가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는 점은 내 삶에 일말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았다. 결과가 나온 날 불안감은 사라졌다. 원치 않던 결과였지만 가늠할 수 없는 미래보다 나았다.


잠시 떠나는 것이다. 5년 간의 뉴욕 생활이 가르쳐 준 수많은 것 들 중 하나는, 내가 능력과 욕심만 있다면 이 도시는 나를 언제든지 반겨줄 것이라는 점이다. 주변 친구들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할 때 "또 돌아오면 되지"라고 대꾸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배신감을 지울 수 없었다.


"뉴욕,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결과가 나오고 6개월 간 뇌에서 울린 메아리다.


친구에게 그 당시의 기분을: "내일 데이트 때 봐, 사랑해"라고 말하며 헤어진 애인이 갑작스럽게 같은 날 밤 SNS로 이별을 통보한 느낌이라 설명했다. 그런 당연함이 부정당한 기분으로 인해 끔찍한 상실감에 시달렸다. 이별을 통보받지만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뉴욕을 사랑했다. 연애가 아닌 짝사랑. 헤밍웨이는 파리를 움직이는 축제라고 칭했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은 뉴욕을 영원한 숙취라고 불렀다. 그 문장을 읽자 구토감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평생 뉴욕이라는 숙취에 시달리며 살 것이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세상이 변한 것처럼 나 또한 변했다.


외부에서의 시간이 줄어든 만큼 내부에서의 시간은 늘어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모르고 살던 자신의 욕망과 결핍을 마주했다. 일일이 열거하기엔 부끄러운 욕망들 중 나에게 가장 큰 정신적 충격을 준 것은 집에 대한 집착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자랐고, 고등학교는 기숙사, 대학교는 또 미국으로 향했던 나는 집이라고 부를 곳을 열망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한국은 일본에서 살다온 나를 "쪽발이"라 칭했고, 일본은 한국인인 나를 "조센징"이라 불렀다. 그렇다고 가정 속에서 안정감을 얻기에는 나는 너무 예민했고, 가족은 너무 둔감했다.


내가 머무는 모든 곳에서 나를 부정했다는 감각을 깨달았을 때 사무치게 외로웠다.


뉴욕이길 바랬다. 내 손으로 내 집을 고른다면 뉴욕이 집이었다. 절대 럭셔리 하진 않지만 내 취향의 물건들로 꾹 꾹 눌러 담아 채웠던 내 공간. 몇 번이나 재배치해서 모서리에 테이프 자국으로 엉망이 된 포스터. 산화된 종이 냄새 가득한 페이퍼백과 LP. 고양이 털이 잔뜩 묻은 검은색 옷이 가득한 옷장. 매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며 변화하는 도시. 잠시 생각에 잠겨 걷다 보면 다른 공간으로 바뀌는 도시. 나는 뉴욕을 너무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선택으로 머무른 장소였고, 처음으로 내 선택으로 내 삶을 채웠던 곳이었다. 그야말로 집이라 생각했다. 내가 고른 집 뉴욕. 그 집이 나를 부정했다.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지 어연 4 달이다. 비자 결과가 나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속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 결국 이 글의 마무리 또한 귀국 후 보게 됐다는 게 그 증거다.


웃긴 점은 나는 뉴욕에서 반쯤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육체적인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소리다. 영양 불균형, 스트레스, 수면 부족, 등 겉모습만 보면 흡사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이 내 뉴욕의 삶은 지속됐다. 뉴욕은 행복하면서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 넘쳐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나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각종 의료 서비스의 해택을 받으며 좋다고 느꼈다. 이게 보호받는 기분이구나.


내가 가장 사랑하던 장소가 가장 나를 병들게 했고, 가장 미워하던 장소가 가장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다. 이 또한 끔찍한 감각이다.


이제는 정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감각과 싸운다. 뉴욕에서는 산책 한 번이면 일주일을 버틸 힘을 얻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기를 쓰고 버텨낼 수 있는 용기를 찾고 있다.


그러기 위해 매 순간 음악을 듣는다. 매일 책을 읽는다. 매주 전시를 본다. 매월 술 한 병을 비운다. 삶에 대해 둔감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틀린 음은 없다, 틀린 맥락만 있을 뿐. 나는 틀린 음이 아니라 믿으며 산다. 지금은 그냥 불협화음의 패시지일 뿐이다. 살아있음 뭐든지 된다. 오래 연주하다 보면 언젠가 불안에서 해결로 가는 순간이 온다. 다들 그렇게 연주해 왔다.


마지막은 내가 믿고 싶어서 쓴 문장이다. 이 감정과 상황에 대해 완벽한 해소는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Deceptive Resolution.

매거진의 이전글 대학생 C.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