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룹
(2016년 2월에 썼던 글 백업.)
최근 데뷔한 아이돌 중에 가장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는 그룹은 여자친구인 것 같다. '유리구슬', '오늘부터 우리는', '시간을 달려서'를 타이틀로 한 세 개의 미니앨범은 각각 입학, 여름방학, 졸업이라는 컨셉으로 3부작을 이루었고, 앨범 활동이 하나 하나 끝날 때마다 그룹의 존재감을 한 단계씩 높여놓았다.
여자친구의 데뷔곡인 '유리구슬'을 듣고 소녀시대의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를 떠올리지 않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직설적인 그룹명으로 한 번, 뚜렷한 레퍼런스로 또 한 번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느낌이었는데 소속사의 네임밸류가 전무한 중소기획사에겐 신인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는 것 자체가 난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굉장히 좋은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표절은 아니었고, 표절인지 아닌지 궁금해서라도 사람들이 '유리구슬'을 듣게 만들었다. 멜로디가 캐치하고 익숙한 무드를 갖고 있는 그 곡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의 플레이리스트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U7icQFVzHo
여자친구가 내세우는 수식어는 '파워청순'이다. 파워와 청순이 병기되었을 때 느껴지는 어색함은 지금까지의 청순 계보 걸그룹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친구의 안무는 6명이 1/6씩의 역할을 해내지 않으면 0이 되어버리는 유기적인 구성을 갖고 있는데, 얼핏 칼군무를 내세운 보이그룹의 안무 같은 느낌이 나기도 한다. 여리여리한 소녀들이 박자를 칼같이 지켜 대형을 이루고, 팔다리 각도까지도 동기화된 것처럼 완벽한 군무를 해내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는데, 그러면서도 노래하는 가사나 표정에서는 소녀의 뉘앙스를 놓치지 않는 게 신통하다. '파워청순 걸그룹'이라는 수식어는 여자친구의 무대까지 보아야 완성되는 단어인 것 같다.
보통 걸그룹에서는 빛나는 센터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룹을 떠올렸을 때 처음으로 생각나는 이름들. 소녀시대의 윤아, AOA의 설현 등.. 이런 멤버들은 실제로 무대나 단체 사진에서 대개 가운데를 차지하고, 그룹을 대표하는 얼굴이 된다. 여자친구는 멤버 구성이 짝수이기도 하지만 신기할만큼 센터가 없는 느낌인데, 오히려 그 점이 '옆 집 수수하니 이쁘장한 여고생' 포지션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 하나가 미모로 먼저 주목을 끌지 않으니 멤버들의 캐릭터가 더 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여자친구는 '꾸밈 없는'이라는 모습대로 스스로를 꾸미는 것 같은데, 실제 여고 교실에 가면 만나볼 수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원은 반에 한 명쯤 있는 키 크고 마른, 그래선지 애들이 따르는 언니 같은 친구. 유주는 공부도 청소도 언제나 열심인 성실한 친구. 신비는 보기엔 깍쟁이 같지만 정작 친해지면 너무 털털한 전학생. 은하는 1분단 첫 줄에 앉아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친구. 예린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많고 쉬는 시간에 편의점 가는 걸 제일 좋아하는 쾌활한 친구. 엄지는 말수가 적고 부끄럼이 많아 발표를 하다가 홍당무가 되어버리는 애기같은 친구.. 연기가 아니라 멤버들의 실제 성격이라고 해도, 어떠한 역할 정도는 부여받은 느낌이랄까. 정말 모든 것이 내추럴이라면 춤+노래+미모 외에 '실제 성격'까지도 밸런스가 완벽한 멤버 구성인 것 같다. 이 여섯 개의 캐릭터가 모여 여자친구라는 하나의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만약 이 팀이 반짝이는 비주얼 센터 멤버로 이목을 확 끌어버렸다면 팀의 아이덴티티가 이렇게 빨리 자리잡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여자친구의 대세감에는 일종의 운도 따랐다고 생각한다. 미끄러운 바닥 탓에 수도 없이 넘어졌지만 벌떡 일어나 무대를 마쳤던 여자친구의 직캠은 외신에서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걸 프로답다고 칭찬하는 분위기는 정말이지 너무도 불편했지만,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임팩트를 남기는 이 영상은 그룹의 인지도를 한껏 올렸고 씩씩하다 못해 비장한 메인보컬 유주(공교롭게도 가장 많이 넘어졌던 멤버이기도 하다)의 목소리에 조미료를 치고 있다. 그룹의 아이덴티티인 파워청순의 '파워'를 지지하는 엄청난 증거자료가 회사에서 나온 콘텐츠도 아닌 팬의 직캠으로, 유투브를 통해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는 사실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럭키하지 않나.
https://www.youtube.com/watch?v=Ag2R7Mt8yI8
여자친구를 좋아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여자친구를 두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 역시 그 부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최소한의 길이의 테니스 스커트, 팬티에 가까운 길이의 짧은 체육복 바지, 허벅지를 모두 드러내는 기장의 치마바지 등이 지금까지 여자친구가 소화해왔던 의상인데, 이런 의상을 입고 발을 얼굴까지 한껏 올려 발차기를 하고 뜀틀 안무를 소화하고 빙글 빙글 돌며 치맛단을 다 들춰버리는데에서 야하다기보단 '낯뜨겁다'는 느낌을 받는다. 치마 안에 보험처럼 입혀 놓은 짧은 속바지에서 나오는 '바지인데 왜요?' '이건 교복일 뿐인데!' 하는 천연덕스러움이 굉장히 변태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특히나 유리구슬 뮤직비디오에서는 그 짧은 체육복 바지를 입고 뜀틀을 뛰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고 있지만 정말 모든 걸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지점들이 많다. 묘하지만 이게 여자친구의 포인트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해서.. 윤리적인 이슈가 있는 것만 아니라면 전략의 문제라고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2018년 2월 첨언: 윤리적인 이슈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이런 방식의 성적대상화는 아주 짙은 찜찜함을 남긴다. 그치만 슬프게도 그게 먹히는 타겟층이 있고 지금 돌아봤을 때 그래 좋은 전략이었다고 생각도 든다. 하지만 수많은 '....'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네.)
이제 시도할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을 때 여자친구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하나와 앨리스 등 일본의 소녀 레퍼런스를 정성스럽게 조합해 '시간을 달려서'라는 결과물을 내어놓았고, 모방이라기보다 재해석과 확장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시작은 '다만세 짭퉁'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여자친구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룹이 되어가고 있다. 그간의 청순 걸그룹들과는 비슷한 방향이지만 다른 길을 내면서. 학교 3부작이 완결된 지금, 여자친구가 다음으로 어떤 컨셉을 시도할지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