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대방의 말풍선에 '그냥'이라는 두 글자만이 덩그렇게 놓여있을 때면 질색하곤 한다. 그냥은 싫다. 장기하의 부럽지 않다는 신곡이 좋다면 어떤 부분에서 좋은지, 부라타 치즈 떡볶이가 별로라면 왜 별로인지 말해줘야 할 것 아닌가. 상대방에게 무심코 던지는 기역과 니은의 허황된 신비주의는 대화의 흐름을 탁탁 막을 뿐이다. 전혀 쿨하지 않다.
처음 그림에 관심을 가질 때도 그랬다. 아주 많은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명에 '그냥'이라는 두 글자를 남긴다. 예술계에서 그냥은 '무제'로 치환된다. 형태라도 보이는 그림이라면 그나마 봐줄 만하다. 캔버스 안 모든 공간을 패턴이나 색으로만 채워놓고 '그냥'이라고 말하는 작가들을 보면 치기 어린 불만이 치밀어 오른다. 이래 놓고 감상을 하란 말이지?
김환기, <무제>, 1970
지난 명절 즈음 김환기의 <무제>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그날은 좀 특별했다. 처음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미술관을 찾아서일까. 아버지는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 오신 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척 좋으셨고, 어머니도 꽤 설레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어설픈 도슨트를 해드린 이후 두 분은 자유시간을 갖겠다 하셨고, 나는 홀로 그의 작품 앞에 다시 서게 됐다. 문득 고마움이 일었다. 알록달록한 색들이 십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그림이 하나의 단단한 매듭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 넓은 여백의 공간에 알싸한 눈물이 차올랐다. '그냥'인 덕분에 작품 앞에서 내 감정을 오롯이 꺼내어 곳곳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다시 친구와의 대화로 돌아가 본다. 나는 단지 그에게 열정과 에너지를 쏟고 싶은 마음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그가 '그냥'이라고 했을 때, 그가 느끼는 감정이 어땠을지 찬찬히 고민하다 보면 내 기분도 슬며시 꺼내놓을 수 있었을 텐데. 이것저것 잘 설명하고 표현한다고 생각했던 '그냥'이 없던 나야말로 그저 그냥이 아니었나 싶다.
오늘부터 그냥도 무제도 사랑해보기로 한다. 그것이 그저 그냥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세상에그냥이여기있더라
안드레아스 거스키, <무제I>, 1993
안드레아스 거스키 展 2022.03.31~08.14 아모레퍼시픽미술관(서울시 용산구)
독일 태생의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대규모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크고 균형미 넘치는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그가 도전했던 많은 기법과 표현방식이 소위 요즘 핫하다는 사진작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은 큰 작품을 걸었을 때 시원시원하고 좋은 것 같네요.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 중 작품명이 <무제>인 친구들을 눈여겨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보다 색다른 감상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