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원

by Noname
스크린샷 2018-12-16 오후 11.36.23.png 20181127 24nga

뮤지컬 헤드윅의 OST인 ‘The origin of love’의 가사는 사랑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태초에 사람은 머리가 두개, 두쌍의 팔, 두쌍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고한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같았다. 어느날, 그들을 두려워한 신은 그들을 둘로 나눠버리고는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반쪽을 찾아 헤매이게 된다.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슬픔과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둘로 나뉘어진 사람들은 각자의 성별을 가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타인에 대해서 왜 그러한 지는 생각 해 볼 겨를도 없이, 그들의 고독과 그들의 아픔을 저마다 안고 긴 세월을 태어난 순간부터 표류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들 말하는 ‘반쪽’을 찾기 전까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란, 마음을 나누고, 경험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행태가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정녕 상대방이 자신의 '반쪽'이 맞는지 확신을 갖기 위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다.


사람은 둘로 나뉜 그 순간부터 완전하지 못하다.

그런 불완전한 판단과 사고에 의존하기 때문에 수차례 실패를 맛보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단 번에 그 ‘반쪽’을 찾아 내기도 한다.

따라서, '반쪽'을 찾는 적당한 시기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장기의 아이가 말을 하는 시기가 모두 다르듯이. ‘대체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인간의 경험으로 정해진 '때'라는 건 그저 그즈음이면 그러하다는 것이지, ‘그때 그래야한다’고 볼 순 없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서른 중반이 다 된 나의 주변은 대부분이 각자의 짝을 찾아서 자신과 닮은 작은 아이를 하나씩 데리고 저마다의 하루를,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서로를 알아봤다는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가 분명 존재하며 ‘이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들어서 함께 하는 것일 뿐이라고한다.


길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 각각의 생각과 삶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이야기와 고민들을 다 모아 놓으면 우주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모두 같이 다른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부 풀어놓고 들어보기에는 인간의 삶이 짧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것을 믿고, 그 ‘운명’에 의해 자석의 N극과 S극이 만나듯 서로를 끌어당겨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견주어서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은 비슷한 미래를 보장하진 않는다. 단순해보이는 N 극과 S극의 자석은 저마다의 자석이 가지고 있는 아주 미묘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 미묘한 차이가 얼추 맞아 떨어져야만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그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미묘한 차이 하나로 수가 틀려버리곤 한다. 가령, 비슷한 그룹 내에서 같은 자극에 A, B, C가 생각하는 방식과 느끼는 감정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수천만의 사람들은 그 수천 갈래의 생각과 감정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같은 세계를 가지고 있기는 ‘벼락을 맞을 확률’과도 갖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 중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여 한 방향으로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O형의 피를 가진 사람이 나머지 혈액형에 수혈을 하듯, 자신의 삶을 수혈하게 된다. 종종 그런 수혈의 댓가가 지나치게 비합리적인 경우도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렇게 삶이 흘러간다. 소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면 바로 그런 수혈의 댓가가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은 그녀가 속한 사회의 통념과 적절히 자신의 삶을 유지시킬 수 있는 ‘조건’에 의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살고 있었다. 어느날 찾아온 타지의 ‘사진작가’는 어쩌면 그녀가 찾기를 쉽게 포기했던 그녀의 ‘반쪽’이었는 지도 모른다. 결국은 불륜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불륜이야기가 오랜 고전이 되어버린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섣부른 삶의 선택이 가져온 그 댓가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을 하기에는 어렵지만, 나이가 들어 사랑의 결실을 맺은 사람들의 결혼 생활은, ‘결혼 적령기’에 허겁지겁 가정을 이룬 여느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제법 일관성이 있어보인다. 우스갯 소리로 ‘아무것도 모를 때 결혼을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연 그런걸까.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적령기’ 커플들의 불화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흔히들 말하는 ‘바람’이라는 것이 그들의 삶에 뿌리 내리게 되는 것은 결국 옆에 누군가가 있다고 해도 적잖은 ‘외로움과 고독’이 내면 깊이 가득 차서 피고름이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한 존재이다. 자기 자신이 아니고서는 온전히 자신을 이해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적 신경증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곁에 누군가가 없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책임을 전제로 그들의 자유를 보장 받는다. 또한 포유동물인 사람은 ‘동물적 감각에 의하여’ 자신의 종족이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해 나아가는 데에 적절한 대책을 강구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정의 가장, 혹은 한 가정의 부모로서의 책무가 따르며, 이를 온전히 이행해야 비난을 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간통죄'가 아무리 사라져도, 부모가 된 사람이라면 그 짜릿한 쾌락의 댓가를 치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는 지도.


오로지 ‘동물적 감각’에 의해서 삶을 선택하는 것은 차라리 쉽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것, 예를 들면 부와 같은 물질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서 상대방을 선택하면 된다. 또 다른 예로는 ‘유전자의 우월성’이 있을 수 있다. 상대방의 지적능력, 상대방의 외모 같은 부분에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우성인자를 만나면 향후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종족’에 대하여 좀더 윤택하고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표면적이고 단순하며 쉬운 문제이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 이론'에 의해 따져봐도, 이 부분은 지극히 당연해진다. 자신이 가진 특징적인 것보다 '조건이 낮은 단계(생존, 안전)'에 대한 욕구라면 더욱 그 선택이 쉬워지며, 그 조건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는 없는 조건을 제공할 수만 있다면, 그 관계는 수월하게 성사가 된다. 하지만 상위 단계로 갈 수록 문제가 복잡해진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현대는 더이상 생존과 안전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인간이 노력을 해야하는 시대가 아니다. 사람들은 사회적 욕구와 존재에 대한 욕구, 자아성취에 대한 욕구(여기에 더해서 미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고 있으며, 그랬을 때, 생물학적 안정성을 넘어 우성인자로 점철된 신인류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를 ‘종족보존의 본능’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와 그들의 뇌가 가지고 있는 기능만큼이나 복잡다단하다.

사랑의 기원, 즉 자신의 반쪽을 찾는 일은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이다. 적어도 30대가 훌쩍 넘어 고독이 익숙해진 누군가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더이상 어린 시절의 패기와 즉흥성으로, 소위말하는 ‘첫눈에 반한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단단하게 뿌리내린 그들의 자아는 적어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자 한다. 공감과 이해, 존중과 인정을 통해서 서로를 다독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목적(종족보존)을 넘어서서 비록 아주 작은 파장에 불과하더라도 그 당대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 장 도르메송의 소설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서 이야기하는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해답은 인간이다."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하나의 개체를 두고 봤을 때, 인류는 개개인의 삶이 되고, 그 개개인의 삶이 비로소 인류를 이룬다. 개개인의 ‘나’가 없이는 인류가 있을 수 없다. 그 개개인의 ‘나’를, 거의 모든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전제가 바로 ‘나’를 온전히 ‘나’로 존재하게끔 만들어 주는 또 다른 ‘나’의 존재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기원이지 않을까.


개별의 ‘나’는 ‘나’를 기억할 무엇인가를 필요로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를 성립시키려면, 이름을 기억할 '업적'과 그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 업적(단지 종족보존일지라도)', 혹은 '그 사람'을 기억할 최초의 '사람'이 바로 ‘나’의 유전자를 온전히 받아들인 ‘나’가 되는 것이다. 최근 유전학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부모의 생각이 DNA에 의해 자손에게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이 DNA의 결합으로인한 충돌이 배제되어야 미래의 혼란을 줄일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게 코드가 맞는 ‘반쪽’이 필요하고 그 반쪽에 의해 파생되어 나온 ‘새로운 존재’가 필요해진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단지 ‘같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The Origin of love’에서 ‘하나’ 존재가 둘로 나뉘는 과정이 정확하게 50:50으로 분리되었음을 전제로 하진 않는다. 정확한 분리는 차라리 완전성을 보장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완전한 인간은 거의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균형’의 문제이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서 ‘균형’을 이룰 수 있을 때, ‘사랑’이 완성된다. 일방적인 수혈의 관계일지라도, 또 그 무엇을 추구하더라도, ‘균형’이 이루어지면 삶과 사랑이 완성된다. ‘균형’을 맞추어야할 지점이 물질인지, 혹은 정신적인 부분인지에 따라서 그 난이도와 시기가 달라질뿐, 결국 인간은 ‘균형’을 맞추어야만 삶을 온전히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균형’을 맞추는 노력이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