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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Dec 21. 2021

혼자 설악산에 다녀온 이야기

처음 가보는 길로 한 걸음 가본다

아이와 함께 올랐다 비를 만나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내려온 게 못내 아쉬워 설악산에 다시 가고 싶었다. 함께 하기로 했던 이들이 연차를 쓸 수 없게 되고, 또 한 명은 체력 문제로 못 가게 됐다. 등산로 앞에 숙소를 이미 잡아놓은 터였다. 혼자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마침 설악산에 눈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설악산 고지대에서 관측된 상고대 모습.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 제공. 2021.11.9일 자 경향신문


준비물에 아이젠과 스패츠가 추가되었다. 아이와 함께 오를 설악산 코스를 조언해주었던 친구가 혼자 가게 되었다니 설악산이 초행길이면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며 펄쩍 뛰었다. 그럼 같이 가자고 날짜 맞춰봤으나 친구가 바꾸기 어려운 일정이 있었다. 남편은 일행들과 같이 가는 줄 알고 있다가 혼자 간다는 걸 떠나기 직전에야 알게 되었다. 아이를 데려가지 않는다 하니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등산이 거듭 될수록 짐이 점점 단출해진다. 설악산에 눈이 왔다는 소식에 정상에서 입으라며 빌려준 거위털 잠바 주머니가 가방의 반을 차지했다. 라면  넣을 보온병이 남은 공간의 이고, 올라가며 먹을 초코바와 사탕  , 인증 도장받아  국립공원 여권 정도가  였다. 여기에 등산  마지막 편의점에 들려 생수  병과 김밥   정도를 추가하게  것이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목마를까, 배고플까, 힘들까 싶어 바리바리 싸갔던 짐들이 줄었다.


새벽 4시 반에 체크아웃을 하고 나오니 사방이 캄캄했다. 하늘에 별이 많으나 즐길 여유는 없었다. 등산로에서 가장 가까웠던 숙소를 나와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올랐다. 이제 막 도착했는지 주차장에서 한 커플이 차 트렁크에서 등산 가방을 빼고 스틱을 나눠갖고 있다. 혼자라도 다녀오겠다며 호기롭게 왔는데 벌써부터 둘 인 모습에 시선이 한참 머문다. 십 여 분 걸려 "설악산 국립공원" 큰 글씨 조형물 앞에 도착하자 거기도 이미 몇 그룹이 모여 북적이고 있다.


아치형 입구 통과하면 이제부터 산 길이다. 아이와 몇 주 전에 와봐서 대청봉 정상 1.8km 전까지는 자신 있었다.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기는커녕 함께 갈 일행을 모았던 이유기도 하다. 헤드렌턴으로 비쳐가며 한 걸음씩 내딛는데 바닥이 온통 낙엽으로 덮여있다. 쉬운 길이 어려운 길이 되어 있었다. 랜턴을 켜고 캄캄한 산속에서 낙엽 덮인 길을 가려니 무서웠다. 두 남자가 지나가고 커플이 곁을 지나가고 나도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올랐다. 6시경이면 해가 떠오를 것이다. 그때까지 많이 오를수록 해 뜨는 걸 더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해 가 뜰 때까지 어둠을 잘 견디며 가보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한 참 오르다 쉼터에서 잠시 멈춰 물 한 모금 마시며 뒤돌아 보니 온통 까만 속에서 구불구불 움직이는 불빛들이 보인다. 길 따라 올라오는 사람들의 랜턴 불이다. 빛들이 졸졸 끊김 없이 올라오고 있는 게 보이니 마음이 놓인다. 1시간을 올라 아이와 함께 오르며 거쳐간 기억 속에 있는 쉼터들을 다 지나 쉼터 6에 도착했나 싶었는데 쉼터 1이 다시 시작된다. 저번에도 그랬나 갸웃하며 쉬어가는데 먼저 쉬고 있던 아저씨 일행 네 명 중 한 명이 혼자 가냐고 묻는다. 그렇다 하니 큰 산은 혼자 가면 위험하다며 자기들 따라가라고 권한다. 초행자에게 같이 가겠냐고 물어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어두운 초행길 산에서 두려운 마음도 일어난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싶다. 이 새벽에 설악산에서 무슨 일이 생기려면 등산로를 벗어나야 하고 혹시나 옷이라도 벗을라 치면 서로 동사에 걸릴 판이다. 무슨 일 만들려 설악산에 오진 않겠구나 싶다.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설악산에 오르는 우리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지만 오늘의 동료들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받아가며 끝까지 잘 가보자 싶다.


해가 뜬다. 6시가 넘었다. 반짝이는 붉은빛이 감돈다. 붉은빛에서 옅은 오렌지 빛으로, 오렌지 빛깔에서 하얀빛으로 그러데이션을 만들어낸다. 조금 뒤부터는 노랗고 하얀 부분부터 컴컴한 하늘까지 푸른빛 그러데이션을 그린다. 빛이 어둠을 이겨가는 형국이다. 매 순간이 아름 다워 넋을 놓고 보았다. "사람들이 왜 3시에 올라가는지 알겠어" 등 뒤로 올라오는 청년들의 말에 나도 "그래, 맞아" 맞장구 쳐졌다. 해가 뜨니 등산이 훨씬 수월하다. 아이와 올랐던 곳까지 가서 같이 가자 권했던 분들과도 다시 만난다. 일행 중 한 분이 몸상태가 안 좋은지 더 갈 수 있겠는지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얼굴이 하얗게 변해있다. 컵라면에 부을 뜨거운 물을 한잔 따라 드렸다. 한 달 전에 왔었다 하니 "마니아네! 마니아야!" 하신다. 컵 돌려받고 먼저 일어섰다.  


오색 코스는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이 연속이다. 대신 대청봉까지 가장 짧은 길로 빨리 올라갈 수 있다. 힘들지만 오르막 길의 한 편에 쉼터가 자주 있다. 좁은 등산로에서 부딪히지 않고 쉬어갈 수 있었다. 계속되는 오르막의 마지막 OK쉼터에 도착했다. 초코바 하나 먹으며 몸상태를 확인했다. 땀이 나면서 배가 차가워져 아침에 먹고 나온 영양제가 걸린 느낌이다. 혼자 가는 길이니 더 아프지 않게 배꼽 위에도 핫팩을 하나 더 붙였다.  


이제부턴 처음 가는 길이다. 비 와서 한 치 앞에 보이지 않았던 위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8시다. 눈길이 시작되어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했다. 9시, 드디어 대청봉에 도착했다. 같이 가자 권했던 일행 분들과 다시 만났다. 아프셨던 분은 많이 나아 보였다. 따뜻한 물 마시고 좋아졌다며 고마워하신다. 대청봉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는데 바람에 서 있기가 어려울 정도다. 몸이 휘청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맞았던 새벽바람은 고속도로 휴게소의 성능 좋고 소음도 큰 손 말리는 드라이기 바람을 떠올리게 했었다. 내가 맞아본 그 바람보다 소리도 힘도 더 센 바람이었다. 왔던 길로 원점 회귀하지 않고 한계령길로 하산길을 방향을 잡아본다. 한계령 하산 길이 더 길긴 하지만 이제 아침 9시니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다.


중청 대피소에 들려 컵라면을 먹었다. 기운을 차린 아저씨 일행은 고기를 굽고 라면에 어묵을 넣어 새로운 요리를 해 드신다. 코로나로 대피소들이 운영을 하지 않고 있지만 다시 문을 열면 다시 와 보고 싶다. 이곳에서 밤하늘을 보고 싶다. 빛 공해가 없는 산 정상에 누워보면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질 것만 같다.


오색으로 올라가 한계령으로 내려오자 했더니 함께 오기로 했던 일 행이 블로그 후기를 보고 지금 자기 체력으로는 못 갈 것 같다고 알려왔다. 민폐가 될 거라 걱정했다. 설악산을 오르는 방법은 수 없이 많겠지만 그중 대청봉까지 이르는 코스는 몇 개가 있다. 오색 코스는 거리가 가장 짧은 코스다. 가장 짧은 오색 코스도 원점 회귀해도 8시간은 걸린다. 함께 못 가는 게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직접 가서 걸어보니 설악산이 큰 산이라는 것이 실감된다. 처음 가는 산이라 유튜브를 여러 편을 보고 왔는데도 직접 와보고서야 그 영상들이 이해되었다. 유튜브 백견이 불여일보다.


대청봉에서 휘청거리는 바람을 맞고 중청 대피소를 지나 한계령 방향으로 내려가며 왜 혼자 가지 말라고 했는지 알게 됐다. 길이 잘 안보였다. 한참 가다가 나뭇가지에 머리가 걸려 돌아보면 사람들이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산악회에서 오셨다는 어르신이 혼자 왔다는 얘기를 들으시고는 보조를 맞춰주셨다. "옆집과는 인사도 안 하고 사는데 산에 오면 다들 이렇게 인사해 좋아" 하신다. 길을 잘못 들까 걱정하던 차에 어르신을 만나니 산신령을 만난 듯 반가웠다. 다음에 오면 백담사 쪽으로 올라 봉정암까지도 가보라 하시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혼자 올라오시는 70대 할머니 분의 이야기도 들려주신다. 올해 바닥에 떨어진 단풍만 실컷 보고 가는 설악산 단풍이 한창 일 때 모습을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에 보이듯 그려주신다. 설악산의 여러 길을 훤히 아는 분과 가니 마음이 놓였다.


혼자 어떻게 내려가나 싶은 큰 바위 덩이를 만났다. 산악회의 일행들을 손잡아 내려주시던 분이 내 차례까지 서 계시다 반갑게 맞아주신다.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이렇게 살게 되는 걸까. 산에서는 물도 나누고 음식도 나누고 인사도 나눈다. 아이와 함께 오를 때의 환대는 또 어떠한가. 산에 오르는 아이에게 대단하다는 격려와 간식이 틈틈이 건네 진다. 아이와 다니며 이런 환대를 받는 곳이 또 어디가 있을까.


서부능선 3.5km 구간은 지도에서 보면 산꼭대기에 있는 평지길로 보였으나 그 안에서는 오르락내리락했다. 양쪽에 산을 내려다보며 걷는 구간도 있지만 양 쪽 산 정상이 눈높이에 계속 있으니 언제 내리막이 시작되나 싶었다. 길긴 길었다. 그러다 내리막이 시작되니 가팔라 정신없다. 한계령은 다행히(!) 해발 900m까지만 내려가면 되니 정상 1600m에서 700m만 내려가면 된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숫자로는 만만했는데 10시간이 가까워지는 등산길에서는 만만한 것이 없었다.


"이제 험한 길은 없지요?" 산신령처럼 나타나 안내해주던 분이 일행들과 합류하는 것을 보고 꽁지에서 떨어지지 않게 가던 것을 멈추고 혼자 내려왔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언제 끝나지, 언제 끝나지 하며 갔다. 혼자 가지 말라 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1km가 남았는데 길이 끝나질 않아!" 통화를 핑계로 한참 앉아 쉬다 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어려울 게 없을 것 같던 길에 오르막길이 음지라 빙판이 되어 있었다. 얼음이 얼지 않은 바위로 밀어 올려주고 끌어올려주며 넘어가던 커플이 나까지 기어이 끌어올려주고 간다. 끝까지 낯선 이들의 도움을 받아 간다.


저기 흘끗 너른 주차장이 보인다. 내려가는 나무데크 계단의 입구도 나타났다. 만세! 탐방로 직원분이 국립공원 스탬프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며 이게 뭐냐고 도리어 물어보신다. 직업군인 생활하시다가 이 자리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신다. 도장 찍어 보내면 메달을 준다고 해서 아이와 함께 산에 다니며 찍고 있다고 설명드렸다.


"끝에 잘 오셨네요. 내일부터 한 달간 산불조심 기간으로 설악산 입산 금지예요"

끝청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곳으로 갔다 돌아왔다는 부부와 인사 나누며 종주를 축하했다.

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이런 차림의 사람 못 봤냐며 물어보는 이도 길 끝에서 만났다. 오늘 처음 만난 설악산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마도 잘 오실 것이다.

나는, 무사히 종착점에 도착했다.


총 15.5km

12시간 반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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