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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위큰 Jun 08. 2023

영랑이 사랑한 오월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영랑이 사랑한 오월이었다.


  연두색이었던 이파리는 햇빛을 받아 초록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군데군데 피어난 새빨간 장미에 눈이 호화스럽다. 아직은 따끔거리지 않은 어린 햇살이 투명하게 살갗에 와닿는다.

  날씨가 낭만적으로 아름다워서인지, 5월은 주변 사람들을 챙길 만한 특별한 기념일들을 잔뜩 끌어안고 있다.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까 한 번씩 얼굴 보며 인사할 기회를 주려고, 그래서 서로를 찾아보게 만드는 기념일들이 오월의 한가운데 안겨있나 보다.





  학교에 있으면 때로는 참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5월에 가속이 붙는다. 고등학교에서 5월은 그야말로 여러 행사와 수행평가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평소와는 다른 여러 스케줄들을 하나하나 챙기다 보면 이상하게도 시간이 훌쩍 흘러 있다.

  4월에 중간고사라고 불리는 1차 지필평가가 끝나고, 곧바로 거의 대부분의 교과가 수행평가에 돌입한다. 학생들은 정신없이 여러 과목의 수행평가를 치른다. 예전과 달리 수행평가는 나름 학생의 성장을 기록할 수 있는 형태로 많이 바뀌었다. 나 때는(라떼는~) 시험 형식으로 수행평가를 치르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교사가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성장, 과정 중심의 다회 평가를 요구한다.

  수행평가,라고 하면 왠지 쉬워 보일 것 같은 느낌인데, 학생들에게 느껴지는 부담은 그렇지 않을 거다. 수행평가는 대학 입시 중 학생부 종합전형에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생활기록부 과목별 세부능력특기사항에 기재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만약 학종 전형을 노리는 학생이라면 수행평가에 자신의 진로를 녹여야 한다. 진로와 관련된 이슈들을 해당 과목과 적절히 엮어 주제를 선정하여 수행평가에 임한다면, 평소 자신이 해당 진로에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대학에 어필할 수 있다.



  무튼,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큰 난제인 입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실 교사로서 수행평가를 기획하는 것 자체가 약간 부담이 있긴 하다. 학생들을 공정한 잣대로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짜여 있으면서, 동시에 학생들이 수행평가에 자신의 진로를 반영하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을 만큼 덜 짜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1학기 수행평가 주제로 <진로 독서 서평 쓰기>를 선정했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에 맞는 책을 한 권씩 선정하여(물론 여가독서를 위한 재미있는 소설책으로 서평을 써도 된다고 했다. 책을 선정하는 데 특정한 리스트를 제공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책을 고르고 독서하는 행위를 노동으로 느끼지 않도록, 개인의 자유와 흥미를 존중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평을 쓰도록 했다. 

  학생들의 선택의 범위를 넓혀 주니, 온갖 책들이 등장했다. 심지어 <전술학>이라는 경찰학 개론서를 가지고 온 학생도 있었다. 오 마이 갓. 나도 저걸 이해해야 되는 건가? 채점을 하려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그래, 어떻게 보면 수행평가는 지필평가만큼이나 피가 튀기는 순간이다. 때로 수행평가를 공지하는 순간에 학생들의 얼굴에는 결연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수행평가를 치른다고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분주하게 떠드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평온한 느낌이 든다. 분주한 시끄러움 안에서 평온함을 찾는 게 모순적이지만, 오히려 주변이 시끄러워서 더 평온하다.


  "우리 발표 주제 뭐 할까?"
  "그럼 이 사이트에서 근거 자료를 찾아보고 말해줄게!" 
  "친구야, 카톡 보냈어. 확인해 줘."



  나는 학생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꼭, 이제 막 피어난 오월의 풀잎 같다. 오월의 햇빛을 받아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꿈들을 내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아직 꿈을 정하지 못한 학생이 여러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모습마저 아름답다. 학생들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그 여린 꿈, 그리고 학생들에게 아직 펼쳐지지 않은 황홀한 시간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아름다울지, 학생들 스스로는 알고 있을까?


  뭔가 하나에 몰두하고 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마다 머리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새싹 하나하나가 마음이 시리도록 참 예쁘다. 나는 어느새 그 새싹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모두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학생들이 너무 예뻐서 왠지 모를 엄마 미소를 짓고 있게 될 때가 있다. 그때 가끔 앞자리에 앉는 여학생이 나와 눈을 마주쳐 오면서 헤- 웃는다. 눈이 예쁘게 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그러면 열심히 수업을 하면서 느꼈던 목의 통증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초임 교사는 학생들을 마주한 오월에, 그렇게 생각한다.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바람은 넘실 천 이랑 만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여태 혼자 날아 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 김영랑, <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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