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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wesome Day to Eat Sep 23. 2018

[김건의 밥투정] 브라이 리퍼블릭

생소함의 즐거움

밤보다는 낮의 이태원을 더 좋아한다. 밤의 그 축제 분위기는 내게 벅차서 정말 가끔만 즐기게 된다. 평일에,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그보다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동네가 나타난다. 한적하게나마 거리와 가게를 채우는 사람들의 반은 인근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과 지인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러 온 이들이고 나머지 반은 가게의 종업원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해이한 분위기는 지켜보는 나조차 나른하게 만들어서 후딱 해치울 점심 메뉴를 온종일 붙들고 있게 한다. 


9월 12일의 점심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손님들은 접시를 진작에 비우고 빈 곳을 다시 담소로 채우고 있었고 종업원들도 유니폼을 입지 않은 지인과 (놀러 온 친구인지 방금 교대한 종업원인지는 알기 힘들었다)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브라이 리퍼블릭이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음식점이었다. 이전에 쓴 글에서 비슷한 풍경을 비판했던 것 같아 부끄럽지만 지켜보면서 딱히 미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광경 속에서 나는 동떨어진 존재다. 항상 바쁜 사람들 틈에 있었던 탓에 이런 느긋한 분위기는 낯설다. 그들이 보기에도 홀로 묵묵히 포크질을 하는 나는 고독해 보였을 것이다. 심지어 지난 수요일에는 난 한국어를 쓰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교포인 듯한 종업원 한 명은 편하게 통화를 하는 것에는 그럭저럭 익숙해 보였지만 존댓말로 내 주문을 받기는 힘겨워했다.


그리고 왜인지 그렇게 외톨이를 자처해 밥을 먹는 게 가끔은 즐겁고 생각난다. 그건 과장을 좀 보태면 내 로망인 호텔에 장기 투숙하는 생활을 상상케 하고 소소하게는 전에 갔던 게스트 하우스의 라운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일 수 있지만, 꼭 그게 아니라도 모든 이해관계에서 잠시 손을 떼고 남들의 일상을 관조하는 것은 머리를 비우는 데 도움이 된다. 어쩌면 바다 건너온 말에서는 내가 그 속에 담긴 번뇌를 느끼지 못해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입구에서 인테리어보다 먼저 눈에 보인 건 가까운 테이블에 운율에 맞춰 놓인 맥주와 맥북이었다. 여유로운 손님이라 생각하고 넘겼지만, 나중에 보니 직원의 것이었다. 나도 반백수나 다름없는 상황이나 그가 여가에 직장을 찾을 만큼의 애착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면 농땡이를 피워도 좋을 만큼 여유 있는 직장에 다니는 것이든 어느 쪽으로나 부러웠다.



그다음에 시야에 든 것은 아프리카의 동물들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여러 인테리어 장식이었다. 세밀한 곳까지 장식이 되어 있어서 가게의 정체성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특히 가젤 뿔 모양의 디스펜서는 어쩌면 이베이에서 손쉽게 구할 수도 있겠지만 왜인지 인테리어에서 진정성을 느끼게 했다. 집에선 쓸 일도 둘 곳도 없지만 탐이 났다.


 주문한 것은 점심에만 제공되는 PULLED LAMB SANDWICH였다. 같이 먹을 음료로 남아공에서 여러 온 주류가 당겼으나 다음 일정 때문에 주스로 아쉽게 속을 달래야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해 식견이 없는 나로서는 눈앞의 요리가 남아공 요리의 정수를 잘 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바비큐의 풍미가 느껴지는 고기와 어마어마한 양의 웨지 감자는 야성적인 가게의 분위기와 제법 부합했다. 1인분에는 과한 양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오늘 운동해서 괜찮다는 마법의 주문을 외치며 기어이 접시를 비워냈다.



고기를 향신료와 익힌 후 찢어낸 샌드위치 속은 육즙은 촉촉하면서도 다른 재료의 맛이 잘 배어 있어 무척 만족스러웠다. 양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매콤한 향이 입안에 알맞게 퍼졌다. 패티와 다르게 고기의 결이 살아있어 아삭한 채소 등등이 없어도 식감이 심심하지 않았다. 최근에 이런 식의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많이 맛볼 수 있었는데 개중에서 제일 육즙이 잘 보존된 느낌을 받았다. 단순하지만 직관적인 가게의 모습이 맛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향신료가 남아공 음식의 정체성인가 해서 여쭤보았으나 영업기밀을 물은 셈이라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때 먹은 것이 국적 불명의 음식이었다 해도 나는 아마 즐겁게 먹었을 것이다. 그게 파스타나 한식이었다면 비슷한 수준의 맛이더라도 그렇게까지 순진하게 행복해하진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해 어떻게든 불만을 찾았을지 모른다. 안경을 끼면 잡티가 잘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생소함은 그 자체로 큰 매력인 셈이다. 사람들의 대책 없는 여유, 이국의 언어와 향신료, 동물적인 인테리어에서 표류하는 것은 백일몽 같은 행복을 준다. 다음 차례에는 그때만큼 즐겁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다들 끊임없이 핫하고 힙한 가게를 찾아 헤매는 것일 테니까.


그래도 불시착한 곳에 항상 낙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처럼 낯선 것을 찾는 마음이 동해 들렀다 데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니 기본은 갖춰야 낯섦이 주는 기쁨도 유효할 것이다. 한 번쯤 더 가도 새로움이 남아 있을 듯해 조만간 들릴 생각이다. 못 먹어 본 남아공 맥주를 먹어봐야 하기도 하고. 그때도 행복하다면 아마 단골이 되지 않을까? 


★★★ 하루가 특별해지는 식사

★★☆ 좋은 식사

★☆☆ 평범한 식사 

☆☆☆ 최악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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