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이지만 아이였습니다.
나는 2남 1녀, 삼 남매의 장녀로 자랐다. 내 주변에는 유독 삼 남매가 많았다. 형제가 둘인 집이 더 흔했지만 삼 남매라면 대부분 딸 둘에 막내가 아들인 구조였다. 흔히 말하는 남아선호사상은 60~70년대의 이야기로만 여겨지지만 1989년에 태어난 나의 시간에도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상,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더 많은 것을 허락받던 남동생을 보며 나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서운함이 아니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결핍에 가까웠다.
그 결핍은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금전적인 부족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채워지지 않는 정서적인 빈자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곱 살의 어느 날, 당시 뉴코아 백화점에서 산 원피스를 여동생과 똑같이 맞춰 입고 주말 저녁이면 백화점 지하 1층 푸드코트에 앉아 다섯 식구가 함께 패스트푸드를 먹던 시간이 있었다. 그 장면은 사진처럼 또렷해서 그날의 풍경뿐 아니라 갓 튀겨낸 프렌치프라이와 치킨버거의 기름진 냄새까지 함께 붙잡고 있다. 이 날이 나의 어린 시절, 내가 누렸던 가장 풍요로웠던 마지막 기억이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엄마가 시작한 요식업이 잘되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시련’이라는 단어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한 학기마다 전학을 다녀야 했고 풍족했던 일상은 더 이상 나누는 것이 아니라 쪼개어 견뎌야 하는 것이 되었다.
여동생이나 남동생만 새 옷을 받는 날이면 괜히 동생들이 미워졌고 부모님은 늘 내게 “엄마 아빠 없으면 네가 부모님 역할을 대신해야지”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은 무른 진흙 덩어리와 같아서 어린 내 마음 위에 얹혀 늘 축축했고 치우려 해도 가슴팍 여기저기를 더럽힌 채 짓누르고 있었다.
첫째였지만 나도 분명 아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늘 다 큰 아이처럼 취급되었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하여 가스불로 계란프라이를 조리해 동생의 끼니를 챙기고 부모님의 칭찬이 목말라 시키지 않은 화장실 청소를 하곤 자랑하던 어린 8살. 동생의 잘못마저 ‘첫째이자 장녀’라는 이유로 대신 혼나고 매를 맞던 날들도 있었다. 어린 나에게 그 순간들은 스스로를 불필요한 존재처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내 아이의 다섯 살도, 여덟 살도, 그리고 지금의 열 살도 여전히 보호받아야 할 아이인데. 왜 나는 그 나이에, 이미 아이가 아니었던 것처럼 살아야 했을까.
‘첫째가 잘되면 동생들은 알아서 잘 큰다’는 말은 누가 만든 걸까. 그리고 왜 나는 그것을 의심 한 번 하지 않고 받아들였을까. 그 말 때문에 나는 어느새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부모님께 첫째라서 힘들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고 그저 ‘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잘됨’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린 나에게 그것은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것,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나의 여덟 살과 동생들의 여덟 살은 부모님께 다르게 존재했다는 점이다. 나의 스무 살과 동생들의 스무 살 또한 마찬가지겠지. 동생들의 여덟 살, 스무 살은 부모님께 언제나 어린아이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둘째를 낳는 일이 아직도 두렵다. 아직 충분히 아이로 머물러야 할 나이에 나처럼 ‘첫째’라는 이유로 먼저 어른이 되어버릴까 봐. 태어난 순서만으로 역할이 정해지고,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육체는 이제 곧 마흔을 향해 가고 있지만 아직도 여덟 살짜리 그때의 아이가 내 안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책임과 의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부모님이 주시는 사랑만 받아먹으며 웃고 싶어 하는 아이. 그저 가볍게 기대고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은 채로 존재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