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기 8일 차 '보홀 첫째 날'
2026년 1월 10일 토요일, 새벽 4시 30분쯤 눈을 떴다.
세부에서 보홀로 향하는 첫 페리를 타기 위해 ‘피어 1’ 선착장으로 가려면 최소 한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새벽 특유의 어수룩한 공기와 분위기는 어느 나라를 가도 비슷하다. 밤새 술에 취해 있던 젊은이들과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상인들의 모습이 한데 섞여 있다. 그 사이에 서 있는 나 역시, 어딘가 ‘이른 아침을 여는 사람들’에 속한 것 같아 묘한 소속감이 느껴졌다. 이런 시작도 나쁘지 않았다.
오전 6시, 페리에 몸을 실었다. 조금 더 편안한 이동을 위해 한국 돈으로 약 3만 원 정도의 비즈니스석을 선택했다. 일반석과의 차이는 만 원 남짓이었지만, 시원한 에어컨과 푹신한 좌석, 그리고 2시간 동안 상영되는 영화까지. 비행기에서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비즈니스석의 쾌적함’을 배 위에서 누려보기로 했다.
이번 보홀 여행은 조금 특별했다. 페리와 숙소 예약, 그리고 전날 급히 잡은 발리카삭 호핑투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야말로 무계획 여행. MBTI로 말하자면 ‘P’들의 여행에 가까웠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
우리 부부는 철저한 계획형, 이른바 ‘파워 J’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준비가 시작되는 사람이다. 꽤 길고도 치밀한 시간. 한 곳을 여러 번 찾기보다는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하는 편이라 여행지 하나하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래서 늘 이런 마음으로 계획을 세운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나는 동선을 짜고 이동 시간을 계산하고 들를 장소들을 구글 지도 위에 하나씩 쌓아간다. 식당 하나를 정하더라도 맛은 물론 휴무일과 대기 시간까지 확인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가능한 변수들을 점검하고 계획은 늘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플랜 B, 때로는 플랜 C까지 준비해 둔다. 그렇게 촘촘히 짜인 일정 속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시간을 잘게 나누어 알차게 보냈다는 뿌듯함이 남는다.
그런 우리가, 아무 계획 없이 여행을 하고 있다니.
조금은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나이가 들며 에너지가 달라진 탓일 수도 있고, 혹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저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느껴보기로 했다. 아이에게,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 더 집중하면서.
오전 8시, 기침약을 먹고 두 시간 내내 푹 잠들어 있던 딸아이를 깨웠다. 아직 몽롱한 아이에게 창밖을 가리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봐.” 맑은 하늘 아래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바다. 보홀은 세부보다 훨씬 조용했고, 어딘가 작은 시골 마을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예약해 둔 호핑투어를 위해 남편이 서둘러 그랩을 호출했다.
보홀의 호핑투어는 대부분 오전 7시부터 시작된다. 바다가 가장 잔잔한 시간에 출발해야 뱃멀미를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돌고래 왓칭까지 포함하려면 더 이른 시간에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돌고래를 만나는 일은 어디까지나 운에 달린 일. 그 불확실함 때문에 여행의 리듬을 억지로 앞당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꼭 필요한 것들만 포함된 투어를 선택했다. 다행히 오전 9시까지 사우스 비치에 도착하면 참여할 수 있는 일정이었다. 문제는 선착장에서 그곳까지 1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느냐였다.
그랩 기사님을 만나자마자 우리는 9시에 투어가 시작된다고 설명하며 조금 서둘러 달라고 부탁드렸다. 푸근한 인상의 기사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도로 위에서 믿음직한 속도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지 맛집을 추천받게 되었고, 그 순간 ‘이게 바로 무계획 여행의 묘미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덕분에 우리는 예상보다 20분이나 일찍 사우스 비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흐름으로 시작된 하루. 여행의 첫 장면부터 운이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넓게 펼쳐진 바다와 커다란 뭉게구름.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씨였지만, 배에 올라 바다를 가로지르는 순간 모든 더위가 잊혔다. 30분쯤 지났을까 산호초로 유명한 발리카삭 섬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가이드 ‘막막’을 따라 바다로 들어갔다. 투명하지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속. 라이프재킷에 몸을 맡기고 오리발을 움직이자, 마치 내가 바다를 유영하는 한 마리의 생명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막막이 물속을 보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장면.
성인 몸집만 한 커다란 거북이가 해초를 먹으며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 우리와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많게는 다섯 마리의 거북이와 같은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한없이 자유로운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이후 우리는 더 깊은 바다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짙은 남색으로 물든 바다에 얼굴을 담그자, ‘잭피시’라 불리는 거대한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은빛 물결처럼 움직이는 장관.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 모든 풍경을 감싸고 있는 바다.
왜 사람들이 보홀의 바다를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바닷속은 고요했고 그 안에는 형형색색의 산호와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한편, 입으로 숨 쉬는 것이 어색했던 아이는 결국 라이프재킷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숨을 참고 스스로 바닷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깊은 바다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혀 경험하려는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내려놓은 ‘계획’이라는 것도,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고.
어쩌다 마주한 행운을 더 감사히 여기게 되는 마음처럼.
성공적인 호핑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그랩 기사님이 추천해 준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하루 종일 바다 위에서 시간을 보낸 탓에, 아이의 얼굴은 햇볕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부부는 아무 말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잘 놀았다는 증거 같아서, 괜히 더 마음이 놓였다.
맥주 한 잔을 곁들여 하루를 천천히 정리했다. ‘바우’라는 식당에서 기대 없이 맛본 망고 치킨은 생각보다 훨씬 인상적이었고 달콤하면서도 이국적인 그 맛이, 오늘 하루의 끝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처럼 무계획은, 때로 행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