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이지만 '혐오'
이번 주 3일을 내리 누워만 지냈다.
청소도, 빨래도, 설거지도 손대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유튜브 쇼츠를 켠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들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웃기지도 않은 밈이 지나가고, 누군가의 성공담이 지나가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일상이 흘러간다.
잠시 싫증이 나면 스레드와 인스타그램으로 자리를 옮긴다. 의미도 없고, 맥락도 없고, 어쩌면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글과 영상들이 내 손가락 끝에서 끊임없이 소환된다.
새로운 유행, 새로운 밈, 오늘의 가십거리들.
내가 묻지도 않은 정보들이 계속 쌓인다.
그렇게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지친다. 무언가를 소비하고 있는데도 허전하다. 지루함이 밀려올 때쯤이면, 이번에는 넷플릭스를 켠다. 그마저도 집중하지 못한 채 또 다른 화면, 또 다른 이야기 속으로 도망치듯 들어간다.
무기력함을 달래기 위한 도피인지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습관인지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인지. 나는 그렇게 누운 자리에서 하루를 흘려보낸다.
그러다 아이가 학원 스케줄까지 마치고 오는 시간이 되면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겨우 일으켜 샤워를 하고 냉장고엔 요리할 재료가 차고 넘치지만 습관처럼 배달앱을 켠다. 자극적인 맛으로 씻겨 내려가는 허기와 공허감 사이에서 배달 음식은 오늘도 나의 저녁 당번을 대신한다.
이렇게 푹 쉬고 난 다음날이면 그간 방전되었던 나를 위해 도약할 수 있는 에너지를 잘 채웠다는 생각을 가지며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쓸모’ 했던 나에게 자기 혐오감을 느끼고야 만다.
전업으로 10여 년간 일을 쉬었던 친구는 내게 고작 3일 쉰 걸로 자기혐오를 느낀다니, 난 나가 죽어야겠다.라고 우스갯소리를 건넸지만 아무렇지 않게 쉬었다는 것에 대해 나는 왜 죄책감과 무기력감을 동시에 느끼는 걸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움직이며 집안 청소를 하고 소파에 잠깐 앉아 쉬면서도 습관처럼
"아무것도 안 했는데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게 가?"라고 말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된 후의 나의 삶은 쉼과 준비를 위한 시간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 삶’에 가까웠다.
해야 할 일, 해야만 할 것 같은 일, 남들처럼 해내야 할 것들 사이를 허둥지둥 뛰어다니며 정작 내 마음이 머물 곳은 찾지 못한 채 살아왔다. 잠시 멈추면 뒤처질까 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봐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쉼은 죄책감이 되었고 비어 있음은 불안이 되었다.
23살, 3년제 간호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종합병원에 취직한 나는 15개월간 중환자실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빠른 취업만이 빠른 성공이라 믿었고 다음 해, 건강상의 이유로 내 나이 24살 5월에 퇴사를 해야 했다. 건강상의 이유라고 했지만 사회 초년생에게 죽을 만큼 힘들었던 3교대를 아파서 그만둘 수 있었던 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경력을 쌓고 앞만 보며 미래를 도약하는 이 시간에 넌 퇴사 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사회생활에 실패한 아무개 1일뿐이라고. 4년제 학위도, 네가 원하는 영어 공부도 결국은 다 돈이 있어야 하는데 고작 개미 코딱지만 한 퇴직금으로 암담한 미래를 위해 걸 테냐고. 수없이 질문하고 좌절시켰던 건 사회도, 부모님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엄마는 줄곧 "너 대학은 가르쳐 놨으니 이제 한숨 돌린다. 남은 동생들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을 하였다. 그렇게 스물넷의 나는 배우고 싶다는 말도, 쉬고 싶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세상에 내놓기 민망한 철부지의 하소연이라 여겼고 20여 년간 자식들을 위해 쉬지 않고 살아온 부모님 앞에서 ‘쉬고 싶다’는 말은 마치 도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배우고 싶다는 마음도, 지치고 있다는 마음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속으로만 삭였다.
그 나이의 나는 말을 아끼는 것이 성숙이라고 믿었다. 일찍 철이 든 탓에 배움의 때를 놓치고 스스로 포기해야 했던 내가 취업 후에는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삶을 버티며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겠다며 배움보다 생계를 앞세웠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비용의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일찍 깨우쳤던 20대의 나.
그 깨달음은 성숙함이 아니라 당시의 나에게 너무 빨리, 너무 무겁게 내려앉은 현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흔을 바라보는 나는 이런 내가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나는 또 아무 목적 없이 쉬고 있는 나를 보며 나는 가장 먼저 ‘무쓸모’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저 혐오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감정 없이 가늠한다.
그동안 견디고 버틴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뿐인데도 나는 그 사실을 불편해하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긴다.
결국 나는 내가 만든 나를 가장 잔인하게 평가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