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먼저 낳은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육아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했다.
“힘들긴 한데 예뻐.”
“낳아봐야 알아.”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속에는, 너무 많은 과정들이 생략되어 있었다.
진짜 육아의 과정은 그 누구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특히 육아를 하며 왜 고대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이 존재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신생아 시절, 아이는 두세 시간마다 깼다. 낮과 밤의 구분도 없었다. 모유나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킨 뒤 다시 재우면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또 울음이 시작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밤에 다섯 시간을,
또 어느 날은 여섯 시간을 이어 자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말하던 ‘백일의 기적’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그전까지의 시간은 그저 버티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잠이 부족하면 사람의 정신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왜 인간이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을 고문으로 사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수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잔혹한 일이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면 서서히 이유식이 시작된다. 미음부터 시작해 채소와 고기, 쌀을 아주 곱게 갈아 넣는다. 마치 나노 단위처럼 잘게 분쇄해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는 것을 하나씩 알려준다. 시간이 지나면 입자는 조금씩 굵어지고, 질감도 되직해진다. 그렇게 이유식이 끝나면 이제 사람 먹는 밥을 먹기 시작한다.
걸음마도 마찬가지다. 처음 몇 걸음을 떼던 아이는 어느 순간 뛰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아이가 넘어질까 봐 뒤에서 함께 뛰어다닌다. 하루 종일 아이의 뒤를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나도 아이와 같은 속도로 살고 있다.
기저귀를 떼면 육아가 조금은 쉬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시작이었다. 아이가 배변 신호를 보내면 좁은 화장실에 함께 들어가 아이가 볼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금 더 크면 뒤처리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휴지를 몇 칸을 뜯어야 하는지,
몇 번을 접어야 하는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아이가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알려주고 지켜봐야 한다.
아이를 쫓아다니며 CCTV처럼 지켜보는 일도 쉽지 않지만, 더 어려운 건 아이의 마음을 함께 버텨주는 일이었다. 육아를 하다 보면 ‘원더윅스’라는 시기가 찾아온다. 아이가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시기라고 한다. 그 시기가 되면 아이는 갑자기 보채고 예민해진다. 이유 없이 울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 시간을 겪을 때마다 아이는 조금씩 성장하지만 내 멘털은 마치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가며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 하나를 키워낸다는 일은 아이를 낳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육아는 내가 학창 시절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수학, 그중에서도 미분과 적분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 수학은 정답이라도 있지. 육아에는 정해진 답도 없다.
하지만 아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엄마”라는 말이 나왔던 그 순간의 기쁨을 아직도 기억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던 그 작고 따뜻한 손길은 어떤 말로 건네는 위로보다도 훨씬 큰 힘이 되어 내게 닿았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격렬하게 사랑해 주는 존재. 그 아이로부터 내가 얻는 힘이 얼마나 큰지 아마 아이를 낳아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도 그들처럼 똑같이 대답할 테지.
"힘들긴 한데 예뻐."
"낳아봐야 알아."
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글쎄.
둘째는 아직도 쉽게 결심하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