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_002]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의 틈바구니

by 여상욱

새벽 5시, 고등학교 영어 교사였던 옆 마을 동갑내기 친구는 2층 다락방 이젤 앞에 앉아 있다. 수업 준비하는 자료가 아닌 캔버스를 앞에 두고 지난 주에 다녀온 유명산 계곡의 풍경을 떠올린다. 친구는 어학 능력에는 천재적 재능을 보이지만 붓을 쥘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하게 30년을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하여 아이들과 씨름하며 잘 하는 일의 자신감이 가져다주는 희열에 빠져 있었다. 퇴직 후 동료 열두 명의 교사들과 갖는 모임에서 여덟 명이나 영어와 전혀 관련없는 취미와 기호에 맞는 제2의 일이나 취미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듣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묘한 부조리로 가득하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치 나침반이 세 개의 자북을 동시에 가리키는 것처럼. 몇 가지 사례를 더 들여다보자.


소방 공무원으로 대도시에서 평생을 봉직한 고향의 한 친구는 시골로 내려가 동서와 나란히 집 짓고 농사 짓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대기업 기획실에서 주로 재벌 기업군 미래 전망과 글로벌 사세 확장을 위해 머리를 굴리던 대학의 동기 한 명은 주말마다 요리 학원을 다닌다. 반대로 음악 대학을 졸업한 후배 한 친구는 바이올린과 첼로에 올인했지만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집안의 당숙이 경영하는 피혁 생산 기업을 도와 주었는데 수완을 인정받아 요즈음은 그 회사의 부대표가 되어 주변으로부터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얼마 전에 만났는데 중국 시장의 내노라하는 기업의 임원들과 교류하고 있다면서 곧 독립한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우리 사회가 '재능'과 '열정'을 다르게 취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능은 외부에서 인정받고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고, 열정은 내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니 생계는 재능으로 해결해야 하고, 행복은 열정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시간의 배분이다. 잘하는 일에는 하루 8시간 이상을 들이지만, 좋아하는 일에는 겨우 주말 몇 시간을 할애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잘하는 일은 점점 더 잘하게 되고, 좋아하는 일은 늘 취미 단계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마치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진다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즉 마태 효과처럼.


퇴직을 하고나니 이 부조리는 더욱 또렷해 보이는 것 같다. 직장에서 쌓은 전문성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지만, 정작 내 마음의 만족 주머니는 허전하기 짝이 없다. 매달 25일이면 들어오는 연금 수치를 들여다보며 이제부터는 좋아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마음 먹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글의 제목에 부조리란 낱말을 넣기는 했지만 이게 정말 부조리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지는 삶의 단편이 아닐까 느끼는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일치하는 삶보다는, 그 사이에서 긴장하고 갈등하면서 균형을 찾으며 사는 것이 더 풍족한 삶이 아닐까? 영어 교사 친구의 새벽 그림은 영어 단어나 회화 문장들보다 더 생생하고, 소방 공무원 친구의 고추 한 가마니나 가지 한 짐은 24시간 불침번 서면서 얻는 인생 교훈보다 소중하고, 글로벌 경영자를 코 앞에 두고 있는 늦깍이 기업가 친구의 부푼 꿈은 바이올린의 4줄 현과 현 위를 비비는 탄력있는 활의 가치보다 훨씬 값지다.


중요한 것은 늦었지만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좋아하는 일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고, 작은 틈이라도 만들어 바람을 불어넣어 그 불씨를 살리고 키우는 것이다. 언젠가 그 불씨가 큰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퇴직 후 조용한 강변 마을에서 책 읽고 글을 쓰면서 만나는 같은 꿈을 꾸는 글동무, 책동무와 나누는 비전은 부조리에 맞서는 가장 아름다운 반란이 아닐까 생각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은 늦었다고 깨달았을 때가 어떤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는 제일 첫 순간이니 이 말은 진실인 것 같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조화시켜 하고 싶은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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