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일몰

by 여상욱

한 해가 저뭅니다. '또'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 해넘이라고 붙잡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이 한 살 더 먹게 하는 마지막 일몰. 시간의 비밀, 시간의 힘 앞에 꼼짝달싹 못 하는 생명체 모두는 긴장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정지하거나 천천히 갈 마음은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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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도 시계 초침은 매일 1,440바퀴를 돌고, 그 일을 365회 반복했습니다. 지구가 틀림없이 자전하고 공전했다는 보고입니다. 광활한 우주에서 행성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지만 얼마나 빠른지를 느끼지 못하고,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회전하지만 듣지 못하는 건 천체 과학에 숨어있는 비밀이라고 하지요. 우주의 이러한 이치가 인간의 공감능력을 떨어뜨리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과학이 인간 사회에 좋은영향만 주는 게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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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에 태어난 손자가 기어다니다 혼자 앉아 장난감을 갖고 놀 정도로 자랐습니다. 손자가 크는 만큼 할아버지는 세월의 무게에 눌려 오그라드는 느낌입니다. 세상의 어떤 존재든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경우는 없을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매일 옷 입고 벗듯이 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일상에서는 세월을 느끼지 못하다가 오늘 같은 날,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거야?'라고 놀랍니다. 빠르게 달리는 세월의 배에 올라탄우리는 힘들면 힘든 대로 바쁘면 바쁜 대로 갑판 위에서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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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들어 연일 계속되는 추위가 만만치 않습니다. 심야전기 난방 집에 살다보니 보일러 전력 요금이 거의 폭탄급이라 실내 온도를 18도로 맞추고 지냅니다. 난방 보조로 벽난로를 때는데 땔감이 바닥나 참나무 장작을 들여놓고, 창문에 방풍 시트지를 붙이고 문틈은 문풍지로 꼭꼭 틀어막았습니다. 기모가 들어간 두툼한 잠옷을 아내와 나란히 입고 겸연쩍게 웃어 봅니다. 혼례식 후에 한 번도 같이 자리하지 못한 사돈 내외와 식사 약속을 잡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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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일몰을 앞두고 앙증스러운 손자가 보고 싶고, 늙음이 무상하고, 난방비를 걱정하고, 사돈과 만날 날을 기다리느라 마음이 분주합니다. 시간의 흐름, 세월이 낳는 희로애락이 아닐까요. 세월은 걸어온 길을 비춰 줍니다. 짧지 않은 길을 왔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갈고 닦은 길은 눈곱만큼 될까말까 합니 다. 누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왔으면서도 불평불만이 가득합니다. 뒤에 걸어올 사람의 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길을 어지럽히기 일쑤였습니다. 나무는 걸어간 만큼 길을 낸다고 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허공을 더듬으며 스스로가 길이 됩니다. 나뭇가지路, 잎으路. 서녘으로 넘어가는 끝 날의 해가 소나무 우듬지에 걸립니다.

황혼이 늘 붉지만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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