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시작하지 않기

사춘기 딸과 맘상하지 않고 대화하는 방법을 찾아서

by 안방마님

작년, 딸이 고2를 지날 때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이 수월치 않았다.

가령, 일요일 입소길에 '학교 급식'에 대해서 불만을 쏟아내면 나는 맞장구의 소중함을 아는 엄마니까 '그렇지, 기숙사 생활하는 고등학생 낙이라곤 먹는 것뿐일 텐데 좀 신경 좀 써 주지' 대꾸한다. 그럼 또 딸은 '그니까, 내 말이' 하며 이야기를 더하고, 소재나 주제는 시원 찮아도 모녀간에 대화가 피어났다. 문제는 그다음 금요일이 되어 퇴소할 때 일어난다. '이번 주 급식은 어땠어? 여전히 별로였어?' 하며 엄마는 지난주에 끊어진 곳부터 대화를 이어 붙여 본다. 내가 이렇게 너한테 관심이 많고 기억력도 남다르다는 생색을 내고 싶지만 꾹 참는다. 그런데 딸의 반응은 '엥? 뭔 급식', '아니 급식이 별로라며....' 나는 어쩐지 자신감이 좀 떨어진 채로 한 마디를 더 내밀어보지만 딸은 '뭐 급식이 다 그렇지'로 대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아 버린다. '나 피곤해'를 온몸으로 말하며.

급식은 쉬운 예일뿐 같이 수행과제를 하는 친구들, 입시를 입에 달고 사시는 선생님, 어려움을 호소한 과목 등등을 소재로 딸이 며칠 사이에 태세전환을 해 나를 뻘쭘하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며칠 사이에 저렇게 뭔가가 너무너무 좋다가, 또 너무너무 싫어질 수가 있나. 그 반대라고 해도 이해하긴 어렵다.


어릴 때부터 거의 모든 것에 좋음이거나 매우 좋음이었던 딸이다. 태생이 투덜이인 내게서 참 좋은 아이가 태어났구나 생각했는데 사춘기를 지나며 모계 유전자가 득세를 한 것인지 뭔가에 불만을 표출하는 것 또한, 태세전환과 더불어 매우 낯선 일이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에도 '역시 내 딸이야' 하며 맞장구를 쳐 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렇게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도덕적 평가잣대를 들이밀어야 하는지 헷갈렸다. 딸의 긍정력에 기대어 대충 '그렇지 그렇지'로 일관하며 편하게 지내왔던 시절이 나를 다시 불러 세우는 기분이었다. 좋은 세월은 갔소.


딸의 변화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먼저 대화를 시작하지 않기였다. 지난주에 신나게 씹어제낀 친구가 이번 주에는 절친이 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엔 너무 좋아서 모든 과목을 그 선생님에게 듣고 싶을 정도였지만 이번 주에는 학생의 인권을 유린하는 악독한 교사가 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답답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무언가 말이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피곤하다며 차에 올라타자마자 눈을 감아버린다면 집까지 절대 묵언수행이다.

이 방법은 꽤 효과가 있어서 주변에 많이 전파하기도 했다. 앞으로 딸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 '50이면 육아가 끝날 줄 알았다'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책에서는 일상의 대화가 아닌 어떤 '사안'을 두고 성인 자녀와 의견이 다를 때를 상정한 것이지만, '자녀가 당신의 의견을 특별히 요구하지 않는 한 말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적혀 있으니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다.


그녀가 주제(친구, 선생님, 급식, 어쩌다 연예인이나 사회문제. 다 거기서 거기)를 던지고 의견을 피력한다. 오, 이건 좋다는 거군, 진단에 확신이 들면 그제야 나도 '맞아, 맞아'를 시작한다. 내가 좀 알고 있거나 경험한 바가 있으면 대화는 조금 더 풍성해질 수 있고, 에피소드가 재미있다면 그녀는 조금 웃기도 한다. 안도감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어, 이건 불만스럽다는 거네, 그렇다면 난 온몸이 귀가 되어 듣기만 해야 한다. 지적질은 금물이다.


삐그덕 삐그덕 어긋남의 시간이었지만 이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니 그렇다는 거지 당시에는 참을 '忍' 찍어내는 공장이었다.) '正'과 '反'의 순서가 뒤바뀌더라도 그녀는 늘 적절한 '合'의 상태에 이르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의 일방통행에 기꺼이 합류하던 딸은 이제 반대 방향으로도 가고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방향도 바꾸고, 심지어는 불법 유턴의 유혹도 받은 것이다. 그 시기 덕분에 나는 딸에게 메시지를 전하던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으로 성장했고 딸도 자기의 의견을 찾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3이 된 지금, 딸은 머리와 마음으로 어느 정도의 '合'에 이른 후에 말을 꺼낸다. 나도 헷갈리지 않는다. 이건 이렇게 생각했군, 저건 저렇게 생각했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중에 혹시 사실 관계가 잘 못 된 것이 있으면 살짝 짚어드리기만 하면 되니 꽤 호흡이 잘 맞는 대화가 오간다.


이제 걱정할 일은 하나, 노년에 본성이 성해져 좋지 않은 부분부터 보고 말을 꺼내는 나의 모습이다. 제발 다가올 시간들이 내게 보드라운 눈과 귀를 주길, 그리하여 입으로도 폭신한 말들을 나눌 수 있길. 딸의 지적에도 노여워 않고 아이고 내 정신! 하며 나를 추스르며 계속해서 쿵짝이 잘 맞는 모녀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