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평균과 아름다운 오류 사이에서
#1 AI는 ‘모범생’이다
챗GPT에게 시를 써달라고 하면, 문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시가 돌아옵니다. 미드저니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면, 구도와 색감이 안정적인 이미지가 생성됩니다. ‘음악‘이야 말로 더 근사합니다. 다른 감각에 비하여 ’정서적 해상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음악’은 더욱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언제나 ‘그럴듯한’ 결과물. 우리는 이 놀라운 기술 앞에서 감탄하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이 불편함의 정체를 이해하려면, 먼저 AI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AI는 마법 상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대한 통계 기계입니다. 수십억 개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학습한 뒤, “이 단어 다음에 올 확률이 가장 높은 단어는 무엇인가?”, “이 픽셀 옆에 놓일 확률이 가장 높은 픽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AI의 본질은 확률 극대화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확률이 높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다’는 뜻입니다. 즉 보편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보편적이어야 할까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정답이, 예술에서도 정답일까요?
#2 클리셰의 자동화
AI는 평균의 미학을 따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줘”라고 요청하면, AI는 십중팔구 웅장한 산맥, 잔잔한 호수, 황금빛 노을을 그립니다. 왜일까요? 인터넷에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태그가 붙은 이미지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AI는 데이터가 가리키는 평균적 아름다움을 충실히 재현합니다.
이것은 실패하지 않는 선택입니다. 누구도 “이게 왜 아름다워?“라고 따지지 않을 안전한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의 마음도 강렬하게 흔들지 못하는 세련된 클리셰이기도 합니다. 마치 공항 라운지에 걸린 풍경 사진처럼—불쾌하지 않지만, 아무도 발걸음을 멈추고 오래 바라보지 않는.
우리는 지금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미지, 텍스트, 음악이 생산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무난하고 매끈한 것들로 가득 찬 시대. 나는 이것을 ‘평균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AI는 이 시대의 가장 효율적인 생산 엔진입니다.
#3 예술은 ‘오류’와 ‘일탈’에서 온다
그런데 미술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예술가들은 언제나 확률 낮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평균에서 이탈한 사람들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해 봅시다. AI에게 “고흐 풍으로 그려줘”라고 하면, AI는 고흐 작품 수백 점을 학습한 뒤 그 스타일의 평균을 추출해 무한대로 복제합니다. 소용돌이치는 붓 터치, 강렬한 노란색과 파란색의 대비—이제 누구나 몇 초 만에 “고흐 같은” 그림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고흐가 했던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19세기 말, 미술계의 주류는 사실주의였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좋은 그림’의 기준이었습니다. 그 기준에서 보면, 고흐는 오류투성이였습니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불꽃처럼 그리고, 밤하늘을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게 묘사하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는 ‘틀린’ 화법이었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그의 그림을 조악하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삐딱함’이 결국 고흐를 고흐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는, 그것이 당시의 평균에서 벗어난 고유한 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남들이 보는 방식으로 보지 않았고, 그 차이를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목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안목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안목’을 기르려면 많이 보고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안목의 본질은 매끈한 평균값을 넘어서, 거칠더라도 고유한 일탈을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모두가 “이상하다”고 말할 때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용기이기도 합니다.
#4 데이터의 중력을 거스르는 힘
그렇다면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창작해야 할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AI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카메라가 발명되었을 때 화가들이 카메라를 거부했다면, 인상주의도 추상미술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술은 도구입니다. 문제는 그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첫 번째 제안은 의도적인 노이즈입니다. AI가 내놓은 매끈한 초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거기에 일부러 균열을 내야 합니다. 가장 확률 높은 단어를 지우고, 전혀 엉뚱한 단어를 끼워 넣어 보십시오. AI가 그린 이미지에서 가장 ‘완벽한’ 부분을 지우고, 거친 손 터치를 더해 보십시오. 이 불완전함이야말로 당신의 흔적이 됩니다.
두 번째 제안은 개인적 편향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AI는 데이터의 ‘객관성’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예술에서 진정한 힘은 종종 지극히 사적인 편향에서 옵니다. 당신만이 가진 기억, 당신만이 느끼는 불안, 당신만이 집착하는 사소한 것들. 이것들은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없습니다. 통계적으로 가장 드문(Rare) 것이 바로 가장 당신다운 것입니다.
AI의 알고리즘은 일종의 중력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평균이라는 중심으로 끌어당깁니다. 이 중력을 거스르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어색하고, 때로는 실패하더라도, 그 저항의 흔적들이 모여 결국 당신만의 궤도를 만들어 냅니다.
#5 당신은 예측 가능한가?
우리를 둘러싼 기술은 끊임없이 우리를 예측 가능한 범위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합니다. 알고리즘은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추천하고, 자동 완성은 당신이 쓸 것 같은 문장을 제안합니다. 편리합니다. 하지만 이 편리함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 우리는 점점 더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좋은 창작자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알고리즘이 예측할 수 없는 변수(Variable)가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AI가 “다음에 이 사람은 이렇게 할 것이다”라고 계산했을 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존재. 데이터의 평균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반대편을 선택하는 존재.
“가장 그럴듯한 정답”을 거부하고, “이상한 오답”을 낼 용기가 있습니까?
AI 시대의 창작자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프롬프트 작성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률에 저항하는 용기, 평균에서 이탈할 줄 아는 심미적 반골 정신입니다. 고흐가 밤하늘을 소용돌이치게 그렸을 때, 그것은 ‘틀린’ 하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틀림이 150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를 전율하게 합니다.
완벽하게 매끈한 평균 속에서, 당신의 아름다운 오류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