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예술적 서핑’
예술은 오랫동안 ‘인내’와 ‘퇴적’의 영역이었습니다. 하나의 걸작을 위해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깎고 다듬는 장인 정신이 그 핵심이었죠. 하지만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온 지금, 저는 조금 다른 방식의 예술적 태도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매주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듭니다. 누군가는 너무 빠르지 않냐고, 완성도가 아쉽지 않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이 속도감이 현대의 새로운 예술 형식을 대하는 가장 영리하고 정직한 방법이라 믿습니다.
#1 기술의 유통기한과 ‘현재성’의 포착
AI 기술의 발전 속도는 경이롭습니다. 오늘 내가 감탄하며 사용한 툴이 다음 달이면 구식이 되곤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몇 달을 들여 정교한 영상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완성되기도 전에 낡아버릴 결과물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떠오른 영감을 지금의 툴로 즉시 구현하는 것. 이 ‘적시성’은 단순히 빨리 만들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가능한 것을 포착하는 현재성의 문제입니다.
Midjourney의 각 버전은 고유한 시대성을 갖고 있습니다. v3의 몽환적 불안정성, v4의 사실적 정교함, v5의 예측 가능한 완성도… 베타 버전의 툴로 만든 작업에는 그 버전만의 독특한 결함과 우연이 새겨집니다. 제 주간 뮤직비디오는 그런 의미에서 기술의 고고학적 기록이기도 합니다.
기술적 완벽함에 매몰되기보다, 변화의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매주 새로운 실험을 던지는 것. 파도를 기다리며 완벽한 타이밍을 노리는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 온 파도를 타고 다음 파도로 넘어가는 것. 이것이 AI 시대에 걸맞은 창작 방식입니다.
#2 거대한 ‘기념비’보다 흐르는 ‘스트리밍’으로
저에게 매주 한 편씩 쌓이는 영상은 일종의 <비디오 일기>입니다.
전통적인 예술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처럼 한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었다면, 저의 작업은 끊이지 않고 흐르는 ‘스트리밍’에 가깝습니다. 그 주에 제가 느꼈던 미묘한 감정, 즐겨 듣던 리듬, 빠져있던 시각적 스타일(로파이, 드림코어, 혹은 90년대 애니메이션 감성 같은 것들)을 즉각적으로 박제하는 것이죠.
이것은 예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매일 흐르는 감정의 결을 실시간으로 포착하는 것. 이렇게 만들어진 조각들은 제작 당시의 신선한 감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이 조각들을 연결하면, 그 어떤 대작보다도 저라는 창작자의 현재를 정직하게 대변하는 거울이 됩니다. 개별 영상은 일기장 한 페이지 같지만, 그것이 모인 채널은 그 자체로 단단한 자서전이 되었습니다.
#3 ‘양’이 ‘질’을 견인하는 큐레이션 능력의 심화
지난 1년간 60여 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들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술적 통찰은 책상 앞의 고민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의 궤적 위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양이 질을 견인한다”는 명제는 AI 이전 시대에도 진실이었습니다. 아라키 노부요시의 방대한 사진 아카이브, 피카소의 압도적인 작품 수가 그 증거죠. 하지만 AI 시대에 이 명제는 새로운 차원을 얻었습니다.
전통 창작에서 “양”이 물리적 노동의 축적이었다면, AI 창작에서 “양”은 큐레이션 능력의 심화입니다. 60여 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들며 제가 훈련한 건 단순히 툴 사용법이 아닙니다. 수천 개의 생성 결과물 중에서 ‘이것’을 선택하는 감각, 우연한 결함을 의도로 전환하는 직관, 여러 AI 툴의 출력을 조화롭게 직조하는 리듬감을 익힌 것입니다.
매주 결과물을 내놓는 행위는 저를 완벽주의의 늪에서 건져 올렸고, 대신 대담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구독자들과 함께 저의 기술적 진보와 스타일의 변화를 공유하는 것, 그 ‘성장 서사’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콘텐츠가 되었습니다.
#4 “완료함”이라는 존재론적 선언
“완벽함보다는 완료함(Done is better than perfect)”
이 실리콘밸리의 격언을 예술 영역에 가져온 것은, 단순한 효율성의 논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AI 아트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AI 아트에서 “완벽함”이란 무엇일까요? 더 정교한 프롬프트? 더 긴 렌더링 시간? 어쩌면 AI 아트는 애초에 완성될 수 없는 형식인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다음 버전, 다른 시드값, 새로운 조합이 가능하니까요.
그렇다면 “완료”의 기준은 외부적 완성도가 아니라, 창작자의 내적 만족의 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 정도면 이번 주 내 감정을 충분히 담았다”는 주관적 판단. 이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예술적 태도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 자체가 AI 시대의 새로운 예술적 진정성입니다. 그간의 작업 중에는 분명 “이건 아니었다” 싶은 작업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실패조차 공개하는 것, 그 솔직함이 구독자들과 형성하는 신뢰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5 걸작과 스트리밍, 두 가치의 공존
물론 누군가는 묻겠죠. “그렇다면 시간을 들여 만든 걸작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가?”
저는 이것이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과 재즈의 즉흥 연주가 각각의 영역에서 위대한 것처럼, 거대한 기념비와 흐르는 스트리밍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담아냅니다.
다만 AI라는 매체가 등장한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형식에 걸맞은 새로운 태도가 필요합니다. 모든 AI 작업이 주간 스트리밍이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 볼 용기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매주 업로드를 기다리는 구독자들과 형성되는 독특한 리듬감, 그들과 함께 성장하는 경험은 전통적인 갤러리 전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술가와 관객이 맺는 관계의 새로운 형태입니다.
저는 오늘도 생각나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빠르게 음악을 입히고 영상을 뽑아냅니다. 거창한 예술가적 고뇌에 빠지기보다 일상의 호흡처럼 창작을 이어가는 것. 이것이 내가 매주 뮤직비디오를 업로드하며 지키고자 하는 AI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입니다.
20년간 큐레어터로서 ‘완성된 걸작’을 큐레이션해 온 제가, 이제는 ‘완성되지 않은 과정’을 스트리밍하는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이 전환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메타-작업입니다.
매주 한 편씩 쌓이는 이 영상들이, 10년 후에는 “2020년대 AI 아트의 실시간 연대기”로서 아카이브적 가치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마치 1960년대 앤디 워홀의 팩토리에서 쏟아져 나온 실크스크린들처럼, 각각은 불완전하지만 전체는 하나의 시대를 증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제가 매주 파도를 타는 이유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NbBgDkZp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