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고독, 그리고 영혼의 농도
#1 깜빡이는 커서라는 제단 앞에서
매일 밤, 모니터의 빈 화면을 마주합니다.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지능의 바다로 향하는 입구, 그곳엔 언제나 창백하게 깜빡이는 커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명령어 입력창'이라 부르지만, 그곳은 우리 심연에 숨겨진 이미지들을 불러내기 위한 일종의 제단입니다.
우리는 그곳에 문장을 써 내려갑니다. "90년대 애니메이션의 노이즈가 섞인, 비 오는 도시의 새벽."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데이터의 조합을 요청하는 지시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 속 어느 날의 습도와, 그 시절 느꼈던 이름 모를 감정을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간절한 '주문(Spell)'에 가깝습니다.
#2 무의식의 호수에 던지는 낚싯바늘
AI를 통한 창작 과정은 낚시와 닮았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의 호수에 '프롬프트'라는 낚싯바늘을 던집니다. 사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낚고 싶은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내면의 어떤 감각이 건드려지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알고리즘이 수억 개의 데이터를 뒤져 내놓는 결과물 중에는 우리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노이즈나 색감이 섞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낯선 오차 안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꿈의 조각을 발견합니다. "그래, 보고 싶었던 게 바로 이거였어."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창작의 주체는 모호해집니다. 이것은 인공지능의 통계적 우연인가, 아니면 인간의 무의식이 AI라는 도구를 빌려 형상화된 것인가.
#3 프롬프트는 현대의 부적입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힘을 빌려오기 위해 종이 위에 붉은 글씨로 부적(Talisman)을 썼습니다. 현대의 창작자들에게는 프롬프트가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부적이 영적인 세계와 현실을 잇는 통로였듯, 프롬프트는 형체 없는 영감과 디지털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연결합니다.
우리가 프롬프트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히 '잘 그려진 그림'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눈앞에 현현(顯現)시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라는 이성적인 도구를 통해 무의식이라는 비이성적인 영역을 소환하는 이 행위는, 인공지능 시대에 되살아난 가장 원시적인 샤머니즘일지도 모릅니다.
#4 무의식에는 저작권이 있는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AI가 학습한 데이터에 저작권이 있다면, 그 AI를 통해 소환된 '인간의 무의식'은 누구의 것일까요.
인공지능은 인류의 모든 기록을 학습했지만, 한 인간이 보았던 9월의 노을과 사랑했던 음악이 그 내면에서 어떻게 섞여 발효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프롬프트를 통해 튀어나온 결과물은 비록 알고리즘의 계산일지라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동'이라는 인장을 찍는 순간 그것은 창작자의 것이 됩니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창작의 물리적 고통은 줄어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의 지문이 묻은 단 하나의 이미지를 골라내기 위한 '선택의 고독'은 더욱 깊어집니다.
#5 사라지지 않는 영혼의 농도
결국 프롬프트라는 부적이 향하는 곳은 기술의 정점이 아니라 인간의 심연입니다. 화면 너머의 무수한 시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 때도, 빈 페이지를 채울 때도 우리는 여전히 내면의 결핍을 동력 삼아 문장을 적습니다.
인공지능이 복제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물을 마주했을 때 툭 터져 나오는 창작자의 눈물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은 저작권이라는 법적 테두리를 넘어, 오직 그 사람만이 증명할 수 있는 고유한 '그리움의 농도'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깜빡이는 커서 앞에 부적 같은 문장을 적어 넣습니다.
잃어버린 또 다른 자신을 소환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