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형적 창작이 우리에게 묻는 것
지난 1년, 50여 편의 뮤직비디오를 생성하며 깨달은 것은 창작이 결코 직선의 도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프롬프트라는 '명령'을 넣으면 결과라는 '정답'이 도출되기를 기대하지만, 실제 창작의 현장은 훨씬 더 무질서하고 역동적인 대화의 장에 가깝습니다.
'비선형적 협업(Non-linear Collaboration)'은 어쩌면 기술이 인간의 영혼에 건네는 가장 정중한 초대장일지도 모릅니다.
#1 '원샷'이라는 오만, '멀티턴'이라는 겸손
우리는 오랫동안 생성형 AI를 자판기처럼 대해왔습니다. 정교한 동전(프롬프트) 하나면 완벽한 상품이 나올 것이라는 '원샷'의 환상 말입니다.
하지만 숙련된 창작자일수록 AI와 수없이 말을 주고받는 '멀티턴(Multi-turn)'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적인 숙련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창작의 주도권을 '나'에게서 '우리(인간과 AI)'로 확장하는 겸손의 과정입니다.
'반복적 정교화(Iterative Refinement)'는 첫 번째 결과물을 의심하고, 수정하고, 다시 질문하는 행위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만족스러운 뮤직비디오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 평균 7~12회의 수정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나의 의도'는 AI의 '의외성'과 충돌하며 더 단단해집니다.
창작은 정답을 맞히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의 의도를 맞춰가는 기나긴 협상입니다.
#2 그라운딩: 고독한 창작자가 마주하는 '공통의 지표'
창작자가 마주하는 가장 깊은 고독은 '나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를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을 때 찾아옵니다.
인간과 AI가 서로의 맥락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라운딩(Grounding)'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90년대 애니메이션의 서늘한 푸른빛'을 AI가 이해하게 만드는 과정은 단순히 키워드를 입력하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나의 취향과 기억, 감각을 AI라는 낯선 타자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공통의 지표'를 찾아가는 티키타카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의 추상적인 감각을 객관적인 언어로 구체화하는 법을 배운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저는 "몽환적"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AI와의 대화를 통해 "soft focus + pastel gradient + slow motion blur"라는 구체적 요소로 분해할 수 있었습니다. AI와의 협업은 결국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수렴됩니다.
#3 사고의 확장과 수렴: 춤추는 인지
AI가 창작자의 '비판적 사고'를 자극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AI가 내놓은 엉뚱한 결과물은 때로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갇혀 있던 고정관념의 벽을 허무는 '성찰적 도발(Provocation)'이 됩니다.
발산(Divergence): AI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수만 가지의 대안을 던지며 우리의 사고를 흩뜨립니다.
수렴(Convergence): 그 혼돈의 숲에서 오직 작가만이 '이것이 나의 색깔'임을 직관적으로 선택하고 끌어당깁니다.
이 비선형적인 움직임, 즉 발산과 수렴을 반복하는 티키타카는 창작자의 인지적 성장을 돕습니다.
AI는 나의 생각을 대신해주는 기계가 아니라, 내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등을 떠미는 파트너입니다.
#4 틈새에서 피어나는 창의성
미래의 업무와 창작은 기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공진화'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AI와 주고받는 그 수많은 티키타카의 '틈새'에 진정한 창의성이 머뭅니다. 명령어로 정의되지 않는 그 모호한 공간, AI의 오답과 인간의 고집이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그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인간의 영토입니다.
붓을 내려놓고 메가폰을 든 감독으로서, 우리는 이제 더 세밀하고 더 철학적인 질문을 AI라는 거울 앞에 던져야 할 시간입니다. 완벽한 프롬프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대화를 지속하는 것. 그것이 AI 시대 창작자의 새로운 미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