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미술관을 나온 기획자는 어떻게 ‘플랫폼’이 되는가
전통적인 기획자의 역할은 화이트 큐브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작품을 배치하고, 관람객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전시가 끝나면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몇 달간 공들인 기획도, 관람객과의 만남도, 전시장 문이 닫히는 순간 휘발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이제 공간의 제약은 사라졌습니다. AI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상상을 음악으로 변환하며 기획자가 다룰 수 있는 재료를 무한히 확장시켰습니다. 물리적 공간의 한계도, 전시 기간이라는 시간의 제약도 희미해졌습니다.
기획자는 더 이상 전시를 만드는 사람(Maker)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고(Create), 매스 미디어를 통해 배포하며(Distribute), 이를 비즈니스로 연결하는(Monetize) 독립된 생태계가 되어야 합니다.
[Create] AI라는 조력자,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 ‘관점’
#1. 생성이 아니라 선택이 창작이다
AI 음악 생성 도구로 작업할 때, 한 곡당 30~50개의 버전을 만들어냅니다. 그중에서 단 하나를 고릅니다. 이 선택의 순간이 바로 창작입니다.
미술관에서 수백 점의 작품 중 전시할 40점을 선별하던 행위가, 이제는 AI가 생성한 수십 개의 결과물 중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도구만 바뀌었을 뿐, 큐레이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AI 시대에 기획자의 경쟁력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다루는 ‘안목’입니다.
#2. 상상과 실행 사이의 시차가 사라지다
전시 하나를 기획하는 데는 최소 3~6개월이 걸립니다. 작가 섭외, 작품 운송, 공간 설치, 홍보물 제작까지. 1년에 3~4개 전시를 연다면 그 미술관은 꽤나 부지런(?)하고 바쁜 공간입니다.
AI를 활용하면 달라집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음악을 만들고, 비주얼을 생성하고, 편집해서 발표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편씩, 1년이면 50편 이상의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생산성 증가가 아닙니다. “이런 전시 한번 해볼까?” 하고 상상만 했을 프로젝트들이, 이제는 모두 시도 가능한 옵션이 됩니다. 실험의 비용이 낮아진 만큼, 기획자는 더 과감해질 수 있습니다.
#3. 나만의 미학을 구축하는 법
로우파이(Lo-fi) 감성, 90년대 애니메이션 스타일, 드림코어 분위기. 기획자가 오랜 시간 쌓아온 심미안은 이제 AI 프롬프트로 번역됩니다.
“AI는 정답을 주지만, 그 정답들 사이에서 취향을 선택하고 맥락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기획자의 몫입니다.”
같은 프롬프트를 넣어도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선택합니다. 그 선택의 일관성이 곧 ‘스타일’이 되고, 그 스타일이 쌓여 ‘브랜드’가 됩니다. 기획자의 고유한 자산은 바로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Distribute] 관객을 ‘구독자’로 만드는 미디어 전략
#1. 24시간 열려 있는 가상 갤러리
미술관 전시는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보통 2~3개월, 길어야 6개월입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철거되고, 기록으로만 남습니다.
유튜브 채널이나 브런치는 다릅니다. 2년 전에 올린 콘텐츠도 여전히 누군가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구독자가 생기면 과거 콘텐츠를 정주행합니다. 디지털 플랫폼은 24시간 열려 있는 개인 미술관입니다.
전시 도록처럼 한정된 부수로 배포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복제되고 공유됩니다.
#2. 구독자는 일회성 관람객이 아니다
중형 미술관의 연간 관람객 수는 대략 3~5만 명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 방문자입니다.
유튜브나 SNS 구독자는 다릅니다. 기획자의 새로운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기다리는 커뮤니티입니다. 이들은 기획자의 ‘안목’을 신뢰하는 사람들이고,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하든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줄 든든한 기반입니다.
수만 명의 구독자는 곧 수만 명의 잠재적 협력자이자 홍보 채널이며, 무엇보다 기획자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지표입니다.
#3. 실시간 피드백이 만드는 기획의 정교함
미술관에서는 관람객 반응을 방명록이나 사후 설문으로 파악합니다. 전시가 끝나고 한참 뒤에야 “이 부분이 좋았구나” 또는 “이건 너무 어려웠나보다”를 알게 됩니다.
디지털 플랫폼은 다릅니다. 콘텐츠를 올리면 몇 시간 안에 조회수, 평균 체류 시간, 댓글 반응이 들어옵니다. 어느 부분에서 사람들이 이탈하는지, 어떤 스타일을 더 좋아하는지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이 데이터는 다음 기획을 정교하게 다듬는 자산이 됩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속도의 피드백 루프가 형성됩니다.
[Monetize] 지속 가능한 생존을 위한 수익 구조 설계
#1. 콘텐츠를 자산으로 만드는 법
미술관 기획자의 결과물은 대부분 기관 소유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시를 만들어도, 그것으로 직접적인 수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월급 외에 추가 수입은 거의 없습니다.
독립 기획자는 다릅니다. 만든 음악은 스트리밍 수익을 냅니다. 글은 후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채널은 광고 수익과 협찬을 만들어냅니다.
더 나아가 콘텐츠를 기반으로 디지털 굿즈를 만들거나, 온라인 클래스를 열거나, 기업 브랜딩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콘텐츠가 여러 방식으로 수익화됩니다.
#2. 취향이 곧 비즈니스 자산이다
기업들은 ‘특정 취향을 가진 기획자’를 찾습니다. 감각 있는 비주얼을 만드는 사람, 특정 세대의 감성을 잘 아는 사람, 새로운 트렌드를 빠르게 포착하는 사람.
AI 도구를 활용해 꾸준히 콘텐츠를 발행하는 것은 곧 포트폴리오를 쌓는 일입니다. 이것이 기업들이 기획자를 찾는 이유가 됩니다. 단순 광고 수익을 넘어, 기업의 브랜딩 전시를 대행하거나 컨설팅하는 고부가가치 비즈니스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3. 커뮤니티는 가장 안정적인 수익원
구독자 중 일부는 기획자의 안목을 더 깊이 소비하고 싶어 합니다. 이들을 위한 유료 멤버십, 프라이빗 큐레이션 서비스, 소규모 워크숍 등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의 도슨트 프로그램이나 VIP 투어가 인기 있었던 것처럼, 핵심 팬덤은 기획자와의 더 긴밀한 관계를 원합니다. 이것이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수익원이 됩니다.
기획자의 시대는 이제 시작이다
미술관을 나온다는 것은 안정을 포기하는 일처럼 보입니다. 매달 나오던 월급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얻습니다. 기관의 방침에 맞춰 기획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산 승인을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전시 기간의 제약도, 공간의 한계도 사라집니다.
AI는 일자리를 뺏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실무에서 해방시켜 본질적인 기획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디자인 시안을 직접 그릴 필요 없이 AI가 해결해주고, 전문 제작자를 섭외할 필요 없이 도구가 도와줍니다.
남은 것은 오직 기획자의 ‘관점’입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이야기로 엮어낼 것인가. 이것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오랜 경력이 만들어낸 고유한 자산입니다.
미술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갇혀 있던 기획자가 스스로 미디어가 되어 세상과 직접 소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독립적인 생존력이 완성됩니다.
우리는 이제 전시를 ‘여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 기획자는 작가이자 편집자이자 출판사이고, 갤러리이자 미디어이자 플랫폼입니다.
기획자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