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거장'이 제안하는 '가장 앞선 감각'
89세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프랑스 노르망디의 정원에서 아이패드를 들고 서 있습니다. 손가락과 스타일러스 펜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그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경이롭습니다. 가장 오래된 거장이 가장 앞선 도구를 쥐었을 때, 예술은 어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까요? 호크니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합니다. "기술은 예술을 방해하는가, 아니면 감각을 확장하는가?"
호크니의 노르망디 작업 중 가장 상징적인 작품은 《노르망디의 1년(A Year in Normandie)》입니다. 무려 90m에 달하는 이 거대한 파노라마 작품은 계절의 흐름을 하나의 긴 띠 형태로 구현했습니다.
그가 아이패드를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속도'였습니다. 해가 뜨는 찰나의 빛, 수선화가 피어나는 순간의 색감을 포착하기에 유화는 너무 느렸습니다. 아이패드의 백라이트(Backlight)는 캔버스보다 훨씬 더 눈부신 노르망디의 햇살을 즉각적으로 표현해냈습니다. 팬데믹 속에서도 그가 전한 메시지, "봄은 취소되지 않는다(Spring cannot be cancelled)"는 이 눈부신 디지털 빛을 통해 전 세계에 울려 퍼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E23HKXklC
데이비드 호크니 ‘노르망디에서의 일 년’ 전시 현장
호크니의 예술은 이제 정적인 감상을 넘어 '흐르는 경험'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의 몰입형 전시 <Bigger & Closer>에서는 작곡가 니코 멀리(Nico Muhly)의 음악이 호크니의 목소리와 함께 흐릅니다.
특히 산가브리엘 산맥을 드라이브하며 바그너를 듣던 경험을 시각화한 '바그너 드라이브' 섹션은 압권입니다. 음악의 리듬에 맞춰 아이패드로 그린 선들이 살아 움직이며 화면을 채울 때, 관람객은 '그림을 듣고 음악을 보는' 공감각적 해방감을 느낍니다. 이는 현대의 AI 기술이 지향하는 '멀티모달(Multimodal)' 경험을 거장의 직관으로 이미 완성해냈음을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aPBT9XdEE
Bigger & Closer 몰입형 전시 프리뷰
생성형 AI가 단 몇 초 만에 완벽한 화풍을 재현해내는 시대, 호크니는 여전히 '직접 그리는 행위'의 가치를 역설합니다. 아이패드 작업의 타임랩스 영상을 보면, 그가 어떤 순서로 선을 그었는지 그 '시간의 층위'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AI는 결과값을 주지만, 호크니는 '과정'을 줍니다. 그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창작자의 '집요한 관찰'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우리가 거장의 서툰 아이패드 드로잉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 속에 기계의 계산이 아닌 한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며 바라본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5J21B-yeTo
데이비드 호크니의 노르망디 봄 작업 인터뷰
#4 당신의 도구는 무엇을 연주하고 있습니까?
호크니에게 아이패드는 단순한 기기가 아니라, 21세기에 새롭게 발견한 '붓'일 뿐입니다. 기술은 창작의 물리적 제약을 덜어주고, 우리의 감각을 더 넓은 곳으로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AI로 음악을 만들고 영상을 빚어내는 과정 또한 호크니의 아이패드 드로잉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의 최신성이 아니라, 그 도구를 통해 어떤 인간적인 진실을 길어 올릴 것인가에 있습니다. 기술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악기처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예술은 비로소 90미터의 파노라마처럼 길고 아름다운 궤적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