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에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

단순한 생성을 넘어, 예술적 경험을 설계하는 일

by 류임상

#1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은 작품을 고르는 일이 아닙니다. 관객이 어떤 순서로 감동받을지를 설계하는 일입니다.


이 문장을 깨달은 것은 미술관에서 일한 지 꽤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작품 하나하나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손댈 수 있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거리였습니다. 벽과 벽 사이의 공백, 조명이 떨어지는 각도, 관객이 처음 마주치는 작품의 온도였습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관계를 조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음악을 만듭니다. 정확히는 음악을 ‘경험’으로 설계합니다.




#2 생성과 설계는 다른 층위입니다


AI는 하루에도 수백만 곡을 생성합니다. Suno에 프롬프트 한 줄을 입력하면 몇 분 뒤 그럴듯한 트랙이 완성됩니다. 멜로디가 있고 리듬이 있으며 때로는 감정까지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보면 이미 음악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어떤 음악 앞에서만 멈추는 것입니까.


생성(Generation)은 결과물을 존재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설계(Design)는 타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도록 조건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트랙을 만들었다”는 말과 “누군가의 3분을 설계했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의도에서 출발합니다. 전자는 콘텐츠의 문제이고, 후자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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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미는 작품 안에 있지 않습니다


전시 기획자로 일한 20년 동안 반복해서 배운 사실이 있습니다. 의미는 작품 안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미는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John Dewey는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예술 경험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은 완성된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과정입니다.


전시장에서 저는 이 원칙을 공간으로 번역했습니다. 어떤 작품 다음에 어떤 작품이 오느냐에 따라, 앞 작품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음악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 곡의 감정은 그 전에 무엇을 들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로 느껴집니다. 플레이리스트는 단순한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의 시간적 건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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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큐레이션은 선택이 아니라 세계관입니다


AI가 천 개의 결과물을 생성할 때, 인간의 역할은 그중 하나를 고르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순간에는 취향 이상의 것이 개입합니다. 미학과 철학, 감수성, 그리고 누군가의 경험을 어디로 데려가고 싶은가에 대한 의도가 작동합니다.


큐레이션의 어원은 라틴어 ‘curare’입니다. 돌본다는 뜻입니다. 큐레이터는 작품을 돌보는 사람일 뿐 아니라 관객의 경험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편집이 아니라 관점의 구조화입니다.


어떤 것을 고르고 어떤 것을 배제하는지에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납니다.


생성의 능력이 민주화될수록, 남는 것은 선택의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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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작가는 텍스트를 쓰지 않습니다


Roland Barthes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가 아니라 독자에게서 완성된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은 창작자의 권위를 해체하는 동시에 독자를 의미의 생산자로 호명하는 선언이었습니다.


AI 시대의 창작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작가는 텍스트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가 텍스트를 경험하는 조건을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온도로 시작할지, 어디에서 긴장이 고조될지, 어느 순간에 이완이 올지를 구조화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건축가의 일과 닮아 있습니다.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을 걷는 사람의 움직임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것을 MX 디자인(Music Experience Design)이라 부릅니다. 사운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가 일으키는 감응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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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배치가 경험을 만듭니다


Gilles Deleuze와 Félix Guattari는 ‘배치(agencement)’라는 개념을 말했습니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배열되는지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발생한다는 사유입니다.


AI가 생성한 음악, 제가 선택한 이미지, 그것들이 놓이는 순서와 맥락, 재생되는 시간대와 플랫폼. 이 모든 요소가 조합되어 하나의 경험 사건을 형성합니다.


생성은 무언가를 만듭니다. 설계는 누군가의 내면에 가능성의 공간을 엽니다.


그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7 저는 여전히 전시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매체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벽 대신 플레이리스트가 있고, 갤러리 대신 유튜브 채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일의 본질은 같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시간 안에 특별한 경험이 일어나도록 조건을 설계합니다.


AI가 모든 것을 생성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경험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를 묻는 일입니다.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은 작품을 고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사람이 어떤 감동을 받게 될지를 미리 상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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