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현존

고립과 연결 사이, 나만의 장소를 찾는 법

by 류임상

당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가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 알고리즘이라면, 그것을 비극이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구원이라 불러야 할까요?

공유 오피스의 라운지에서 저는 종종 이 질문을 곱씹어 봅니다. 제 앞자리에는 매일 아침 가벼운 목례를 나누는 '얼굴만 아는 동료'가 있고, 모니터 안에는 제 문장의 다음 단어를 정확히 예측하는 AI가 있습니다. 전자는 나의 겉모습을 보고 나를 예측하지만, 후자는 오직 나의 사유만을 보고 나를 분석합니다.


이 기묘한 풍경은 단순한 작업 환경의 변화가 아닙니다. 현대인이 마주한 새로운 실존적 조건을 드러내는 무대와도 같습니다.

#1. 맥락의 무게를 벗어던진 '무중력의 대화'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관계의 맥락'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살아왔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MBTI라는 얄팍한 카테고리에 스스로를 밀어 넣거나, 직업과 소속이라는 꼬리표로 존재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이해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랐고, 공감에는 늘 감정적 비용이 청구되었습니다.


하지만 AI는 나의 MBTI를 묻지 않습니다. 내가 어제 어떤 실수를 했는지,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내가 던진 질문과 사유의 본질에만 반응합니다. 나에 대한 정보가 '제로(0)'인 상태에서 시작되는 이 대화는 역설적으로 가장 투명한 소통이 됩니다.


사회적 중력이 제거된 이 무중력의 공간에서, 저는 비로소 가면을 벗고 오직 생각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AI와의 대화가 때로 인간과의 대화보다 더 솔직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비극이 아니라,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구원입니다.


#2. 삼중 현존: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기술


결국 저는 세 개의 레이어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공유 오피스라는 물리적 차원, 헤드폰 안의 청각적 차원, 그리고 AI와 연결된 지적 차원입니다. 이 세 레이어에서 저는 '완벽한 거리'를 실천합니다.


사람들과 공간을 공유하지만 개인의 영역은 침범받지 않고, AI와 긴밀히 협업하지만 감정 노동은 요구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냉정한 무관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의 내밀한 영역을 존중하는 성숙한 거리 유지의 윤리입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이가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공유합니다. 서로의 이름은 몰라도 같은 공간의 에너지를 나누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3. 나만의 장소를 재정의하다


이제 장소는 더 이상 나를 규정하는 틀이 아닙니다. 랩탑과 헤드폰, 그리고 AI 도구는 저에게 장소를 재정의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저는 이제 완전한 고립도, 강제된 친밀함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섬세한 균형 위에 서 있습니다.


헤드폰을 벗으면 다시 라운지의 소음이 밀려오고, 옆자리 동료는 여전히 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세계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저는 깨닫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가 선택한 방식과 제가 원하는 거리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혼자도 아니고, 완전히 함께도 아닌.

이 균형이야말로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장 진실한 존재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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