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온동물

일상

by Axiom



늦잠을 잤다.

왠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아무래도 몸살기운이 있는 것 같다.



억지로 몸을 이끌고 출근 준비를 한 다음 집을 나섰다.

유달리 차가운 공기와 흐린 하늘.

곧 눈이 올 것 같았다.



버스를 탔다.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만 사람이 차 있었다.

적당히 빈 공간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립 대신 그 위에 달린 스트랩을 잡는다.

버스가 흔들릴 때 괜히 더 안정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바로 앞의 좌석에 앉은 남자가 유튜브를 보는 게 보였다.

자막을 보니 특정 정당 지지자들을 욕하는 내용이었다.

'걔네는 완전 위선 투성이에, 변태에...'

얼른 눈을 돌려 버스 창밖을 바라봤다.

비슷한 색깔의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병원까진 가까운 거리라 금방 도착했다.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진료실에 안착했다.



외래담당직원이 따라 들어오더니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원장님, 첫 환자가 초진인데요... 관상이 좀... 그래요. 조심하세요."



그래요? 알겠어요.

아침 첫 환자부터 쉽지 않나 보다.



직원이 나간 후 환자가 들어왔다.

여성분이셨는데 과연 심상치 않았다.

겨울인데도 노출이 많은 복장.

여기저기 보이는 문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사나운 표정.



솔직히 조금 겁먹었다.

그래도 나는 프로다.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오전 외래 진료와 오후 수술까지 마치고 나니 퇴근 시간까지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휴게실에 가니 동료가 TV에 유명한 댄서들이 나오는 채널을 틀어놓고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TV 속 댄서들의 무대 의상을 보고 있자니 오전의 환자가 생각났다.

거친 인상과 다르게 그녀는 예의 바르고 배려심도 넘치던 분이었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10번 이상 하고 가신 것 같다.

덕분에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 이 기사 보셨어요?"



동료가 내게 핸드폰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기사는 어느 지방의 의료 사고에 대한 판사의 판결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댓글 반응을 보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기분만 망칠 것 같았다.

핸드폰을 돌려주자 동료가 말을 이었다.



"하... 판사 놈들 갈수록 너무한 거 같지 않아요? 요새 판검사들은 다 왜 이러는 거야? 우리한테 뭐 원한이라도 있나 봐요. 댓글 보셨어요?"



안 봤어요. 뻔하잖아요.



"그렇지, 안 보는 게 현명하지. 어차피 다들 의새라며 욕하고 있을 테니까. 진짜 나라를 떠야 하나..."



도망친 곳엔 낙원이 없다라는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이후 잡스러운 스몰토크를 나누다 보니 금방 퇴근 시간이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눈이 오고 있었다.



몸살기운이 아직 느껴졌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은 소개팅 약속이 있었다.

아니, 이제는 선이라고 해야 하나.

순간 어머니의 걱정섞인 잔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눈 내리는 풍경을 담은 창문.

분위기 있는 인테리어용 조명들.

약간 더울 정도의 실내 온도.

무난한 맛의 파스타.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흐름의 대화.



"혹시 MBTI가 뭐세요?"



나왔다.

단골 문제.

이제는 수능으로 나와도 되지 않을까?

여기서 대답은 두 갈래로 보통 나뉜다.



INTP에요.

혹은

맞춰보세요.



병원에서 친하게 지내는 소아과 전문의 누나가 있다.

나는 그를 핸드폰에 [MBTI중독자]로 저장해 놨다.

그가 예전에 내게 한 말이 기억났다.



'INTP가 연인으로선 최악이래. 넌 혼자 살아라.'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으므로 단순한 루트를 선택했다.

(사실 후자는 별로라고 생각해서 잘 선택하진 않는다.)



INTP입니다.



그러자 그녀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 INTP시구나..."



이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뭐, MBTI가 다 맞는 건 아니죠."






집으로 가려면 버스를 2번 갈아타야 했다.

추운 날씨, 굵은 눈발, 몸살 기운이라는 세가지 핑계를 이유로 택시를 탔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소요시간이 25분이라고 나왔다.

그때, 주선자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 야, 만났어?



평소에도 궁금한 건 못 기다리는 성격의 친구다.



- 어땠냐? 느낌 좋았어?


처음엔 괜찮았는데, 나 INTP이라고 이야기했더니 말이 줄어드시던데?


- 아 그래?


인연이 아닌 듯?


- 너, 뭐 또 이상하고 진지한 이야기한 건 아니지?


야, 나 그 정돈 아니야.


- 확실해?


아마?


- 야, 됐어. 그럼 버려 버려.


그래, 소개해줘서 고맙다. 다음에 밥살게.


- 됐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또 알아볼 테니까. 어서 집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그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른 게 느껴졌다.

날 생각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때, 택시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유튜브 영상 소리가 들렸다.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였다.



"악어는 변온동물로서 체온 유지와 에너지 보존이 생존의 핵심입니다. 이들의 뇌는 복잡한 감정이나 사회적 맥락을 처리하기보다 즉각적인 분류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악어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먹을 수 있는가?', '나를 해칠 것인가?', '짝짓기 대상인가?'라는 세 가지 범주 안에서만 빠르게 판단합니다. 그 외의 복잡한 정보는 뇌에서 처리하지 않고 폐기합니다."



몸살 기운 때문인지 머리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오한에 더하여 이젠 약간의 열감도 느껴졌다.

설마 독감은 아니겠지.



"개구리 또한 매우 효율적인 시각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구리는 눈앞의 모든 사물을 정밀하게 관찰하지 않습니다. 개구리의 망막에는 '작고 어두우며 움직이는 것'에만 반응하는 특수한 세포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지되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즉각 혀를 내두릅니다. 개구리에게 그것이 '파리'인지 '검은 종이 조각'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멀미할 것 같아 창밖을 바라봤다.

높은 빌딩 외벽에 붙은 거대한 전광판 하나가 보였다.

유명한 카드 광고와 문구가 나오고 있었다.



[복잡한 건 질색인 당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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