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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을 찾습니다

번개산행 첫날 이야기

by 부리

참석자는 ○○공원 주차장, ○○시까지 집결


공원 주차장이 우리 집 마당도 아니고, 대체 그 넓은 곳 어디쯤에 서 있어야 하는 건지.... 묻지 마 관광을 가도 탑승 위치와 차량 번호쯤은 알려줄 텐데... 다 큰 어른들이니 이쯤은 알아서 찾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건지... 집결지도 못 찾는 모지리와는 동행하지 않겠다는 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일정이 되는 날이라 무작정 참여신청을 하고 보니 정확히 어디서 모여 어떻게 이동한다는 말도 없고, 몇 시에 하산한다는 말도 없었다. 어둑한 새벽, 공원 주차장을 어슬렁거리는 나를 향해 시커먼 승합차가 달려오고 순식간에 덜미를 채인 나는 흙먼지와 함께 흔적 하나 없이 사라져 가는, 경찰청 사람들 속 한 장면 같은 상황을 몇 번이나 그려봤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광역시. 그것도 CCTV와 블랙박스가 널린 공원 주차장에서 치 혹은 인신매매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지... 한참이나 뒤떨어진 시대감각 스스로 생각해도 뒷목이 당길 지경이었다.


산행 전날까지 별도의 공지는 없었다.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먹은하나포기하기엔 많은 나이, 지금 도전해 보지 않으면 어영부영 아무것도 못 하고 살다 갈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냅다 줄행랑을 치더라도 일단 가고 보자는 마음으로 산행 당일, 약속된 장소에 갔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공원 주차장은 허허벌판처럼 휑하게 비어 있었고 사람이라고는 저 멀리 가로등 아래에 있는 남자 하나와 나, 둘 뿐이었다. 저 이는 왜 새벽부터 이 공원에 와 있는 것인지, 저 이도 오늘 산행에 참여하는 사람인지, 이 새벽 공원에는 어떤 이들이 무슨 사유로 모여드는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저 멀리서 찢어질 듯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쌤씨~? 쌤씨~?"


'쌤'이라고?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둘러봤지만 공원엔 이름이 '쌤'일 것 같은 외국인도, '김쌤'이나 '이쌤'으로 추정되는 한국인도 없었다.


"쌤씨~? 쌤씨~?"


남자의 목소리는 더 날카로워졌고 나는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공원을 가득 메운 고요와 한기를 뚫고 무섭게 달려드는 그 목소리에 발이 묶여버린 것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남자에게 가위표를 그려 보였다. 남자는 내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그제야 소리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주머니 어딘가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김쌤인지, 이쌤인지 모를 어떤 이에게 전화를 걸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남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주차장 출입구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납치 혹은 폭행사건의 증인을 확보하면서도, 증인이 되어줄거라 믿었던 이가 범인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온전히 배제하지 않은 거리. 모르는 남성과 나 사이에 필요한 적당한 거리는 대략 3미터 정도였다.


이날 산행에 참여하기로 한 사람은 주최자를 제외하고 나 포함 총 4명이었다. 주차장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가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한 걸 생각하면 그들도 머지않아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 꽃잎을 한 잎, 두 잎 뜯어내며 주차장 출입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온다. 곧 온다. 지금 온다. 바로 온다....'


꽃점을 치다 내 마음이 곧 황무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차 두 대가 연이어 들어왔다. 차 두 대는 남자와 나처럼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며 멈춰 섰다. 그리고 얼마 뒤 등산복을 입은 여자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들은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고, 배낭을 꺼내 메고, 등산화 가방을 챙겨들며 산으로 갈 채비를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이 등산객이라는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먼저 가서 말을 걸어볼까 몇 번을 망설이다 그냥 조금 더 그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채비를 끝낸 그들은 걷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터벅터벅. 자기 집 냉장고나 화장실을 찾아가듯 무심해 보이는 그들의 발걸음은 옆에 있는 남자 앞에서 멈췄다.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 중인 사람이 ,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 하나, 그리고 나까지 다섯. 공원 주차장 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우리 다섯 뿐이었고, 다섯은 번개산행 참여 인원과 똑 맞는 숫자였다. 이쯤 되면 모든 정황이 단 하나의 답을 향하고 있었다.


"저기... 혹시 오늘 가지산 산행 리딩자님이신가요?"

"네. 맞아요. 산행하러 오셨어요? 혹시 정부리씨?"

"네."


남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타박하듯 큰소리로 말했다.


"아까 에스엠씨(SMC) 맞냐고 물었을 때 왜 아니라고 했어요?"


남자가 외치던 것은 외국인 쌤도, 김쌤도 이쌤도 아닌 등산 동호회 이름이었다.


"아... 그게.... 제가 잘못 들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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