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정리를 시작했다. 클라우드를 사용하게 되면서 용량 걱정 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바람에 휴대폰 사진첩도 엉망인 데다 7년 만에 컴퓨터를 바꾸게 되면서 이참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사진들을 정리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가뜩이나 잘 분류돼 있지도 않은 폴더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보니 이게 여기 왜 있는지, 이건 아까 거기 있던 거 아닌가, 이게 원본인가 싶은 파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7년에 걸쳐 이 컴퓨터를 써 오는 동안 정리란 것을 조금은 더 잘하는 사람이 되었지만(조금은 덜 disorganised한 사람이 되었지만) 이미 충분히 구석구석 야무지게 어질러 놓은 과거의 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거지.
고3 수험 생활이 끝나자마자 토이카메라, SLR 할 것 없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후로 쭉 사진을 찍어오다 언젠가부터는 꿈에서도 종종 사진을 찍는다. 아주 초반에 찍은 사진들 일부는 보관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남아있지 않지만 현재까지 보관 중인 사진들 중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추정되는 것이 한국에서 막 대학에 들어갔던 2007년 찍었던 것이니 그사이 쌓인 사진의 양도 결코 적진 않다. 스캔 원본들은 의외로 체계적으로 잘 정리돼 있는데 문제는 그 사진들을 편집하거나 분류하면서 생긴 복사본이나 수정본이 여기저기 정신없이 저장돼 있단 거다. 오랜 시간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오는 동안 휴대폰 카메라 성능은 날로 좋아져 매일, 너무 쉽게 찍어 온 디지털 사진들까지 더해지니 정리는커녕 정리를 포기하고픈 마음부터 다잡아야 할 지경.
2009년 여름,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20대의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낸 뒤 서울-베를린-서울-부산을 거쳐 2021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작업도 하고 전시도 하고 술도 많이 마시고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멀어지고 새로운 곳을 가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던 그 시간 속 어느 순간마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사진으로 남겨두어 두고두고 기억해야겠단 생각이 드는 순간들보다도 막상 사진에 담을 수도 없는 종류의 무언가에 이끌려 당장 그 순간밖에는 생각할 수 없던 순간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그동안 내린 크고 작은 결정들 앞에서도 셔터를 누를 때와 비슷한 마음은 아니었는지.
그렇게 차곡차곡 찍어온 사진들을 정리하겠다고 뒤집어엎으니 지난 10여 년의 시간이 우르르 쏟아져 한눈에 펼쳐지는 중이다. 곧고 높이 쌓여가기보단 우르르 눈앞에 쏟아져 펼쳐져야 말이 되는 시간을 만들어 오고 있던 나는 여전히 한 손에 포인트 앤 슛 카메라 하나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설 테다. 나중에 가서 볼 수도 없을 사진을 열심히 찍어대는 꿈에서처럼 계속 열심히 셔터를 누르다 보면 하나 가득 쌓인 시간들이 또 한 번 우르르 쏟아져 말이 되는 말을 하고 있겠지. 우선은 이번에 쏟아놓은 시간들을 잘 정리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