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한 달 생활자

공과금은 낼 필요 없는 한 달 생활자의 한 줌짜리 삶

by 김아영

"혹시.. 한 달 살기 해 볼 생각 있어?"


시작은 그러했다. 퇴사를 몇 주 앞둔 시점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직장에서 무려 6년간 열과 성을 다해 일했으니 이만한 보상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일종의 보상 심리였을 수도 있다. 퇴직원을 제출한 그 시점부터 '퇴사하면 뭐할 거니'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두리뭉실한 답변을 내놓고는 했다. 미래 계획에 관해 알려주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이렇다 할 구체적인 계획이랄 게 없었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 소진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고자 내린 결정이었다. 이직, 진학 등의 생산적인 플랜을 세워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퇴사 후의 생활을 짧게나마 그려보았다. 알람 없는 삶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입이 찢어졌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늦게까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어도 괜찮다. 새벽에 잠들어도 다음 날 늦잠을 자면 그만이다. 낮밤이 바뀌어도 얼마든지 집에서 뒹굴거리며 쉴 수 있다. 다가오는 월요일에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되는 삶이란.. 하지만 이것도 상상일 뿐이었다.


집순이 라이프가 원체 적성에 맞지 않는 나는 며칠도 못 가 밖으로 나돌게 뻔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결국 집보다는 집 밖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을 선호하는 탓이었다. 전 직장은 오전 8시 출근-오후 8시 퇴근이 일상적이었는데, 8 to 8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몸이 타임 리치 백수 생활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퇴사 후엔 여러 가지 심리적 변화가 찾아온다고 들었던 지라 사실 조금 겁도 났다.


그러던 중, 공교롭게도 마침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던 친구이자 동료 만나 씨도 같은 시기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만나 씨는 나와 여행 정서가 잘 맞는 사람으로, 이미 예전에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추진력이 강하고 모험심이 뛰어난 그녀는 퇴사 후 동유럽 일주를 계획하고 있었다. 슬쩍 물어보니 역시나 여행 파트너는 없었다. 이 사람은 재직 중에도 3박 4일간 휴가를 내어 혼자서 로마를 다녀온 전적이 있었다. 대개는 최소 일주일은 잡고 떠나는 여행을, 이 사람은 본인이 떠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4일 만에 다녀왔다. 그러니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나 또한 막연하지만 '여행은 가야지'하고 있던 참에 그녀의 여행 계획을 들었고, 나는 한 달 살기를 생각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전반적인 생활비와 집세를 고려해 발리나 치앙마이, 유럽에서는 헝가리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원격근무를 하는 디지털 노마드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도시를 참고했다.) 서로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우리 앞에는 약간의 정적과 긴장이 내려앉았다. 지나고 보니, 그 찰나의 침묵은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임을 서로에게 알리는 어떤 시그널이었다.


"그럼 우리 같이 한 달 살기 할래?"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뜻만 통했으면 됐지, 뭘. 결심과 동시에 여행 계획 수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실 한 달 살기의 경우에는 집세가 가장 중요하다. 생활비도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집세는 숫자 단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체감상 훨씬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집을 알아보던 우리는 그나마 집세가 저렴한 편인 동유럽으로 결정했다. 퇴사 시기가 바캉스 시즌과 겹치는 통에 서유럽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프랑스, 영국의 경우 집세만 내다 돌아와야 할 판이었다. 물론 파리, 런던이 아닌 지방 도시에 자리를 잡으면 그보다는 저렴해지겠지만 우리는 각 국가의 수도에 거점을 잡기를 원했다.


알아보다 보니 베를린 집세가 저렴하다는 것도 다 옛날 말이었다. 힙스터의 도시이자 문화의 중심지 베를린은 이미 포화 상태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고, 집세는 날이 갈수록 껑충껑충 뛰고 있는 추세였다. 그래도 독일이니 생활비 면에서는 세이브가 되겠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우리 예산에는 맞지 않았다. 결국 동유럽으로 다시 눈을 돌린 우리는 애초에 계획했던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결정했다. 성수기였음에도 집 컨디션에 비해서는 저렴한 가격이었다. (겨울이었다면 더욱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서는 일단 최대한 식비를 줄여야 했다. 정확히는 외식 비용. 그 먼 곳까지 가서 쫄쫄 굶으며 허리띠를 졸라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풍족한 여행자처럼 삼시 세끼 외식으로 재산을 탕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한 두 끼는 집에서 해결하겠다는 가정하에 우리는 주방이 딸린 집으로 알아보았다. 각자의 요구 사항은 끊임없이 늘어나기만 했다. 동행인은 한 달이나 머무는데 집 내부에 세탁기가 없으면 말이 안 된다는 주의였고, 나는 뒤늦게 동의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동의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부엌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탓에 세탁기 옵션은 뒷전이었던 것이다. 우리 두 사람에게 있어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집기가 갖춰진 주방과 널찍한 침대, 빵빵 잘 터지는 Free Wi-fi와 신형 세탁기였다.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적당한 가격대의 적당한 아파트를 찾았다. 위치도 두 말할 것 없이 좋았으며 숙소 주인은 슈퍼 호스트였다. 후기도 청결하다, 인테리어가 세련되었다, 물도 잘 나오고 인터넷도 잘 터진다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리뷰가 좋으니 믿음은 쉽게 생겼다. 우리는 이보다 더 좋은 숙소는 찾기 어렵다는 생각에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금이라도 추가 할인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에어비앤비는 호스트의 집을 빌리는 것이기 때문에, 운이 좋은 경우 훨씬 저렴한 가격에 숙소를 빌릴 수 있다. 일종의 딜이나 마찬가지인데 특별가 제안은 순전히 호스트의 마음에 달려있다.


우리는 사정을 이야기해서 최대한 숙소를 깨끗하게 쓸 테니 추가 할인을 해줄 수 있겠느냐 물었고, 호스트는 가능하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결국 월간 할인에 30만 원 추가 할인된 금액으로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다. 깨끗한 주방과 세련된 욕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볼 수 있는 스마트TV가 갖춰져 있다는 것이 이 아파트의 최대 장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집 근처 도보 3분 거리에는 큰 슈퍼마켓과 은행이 있고, 다리만 건너면 풍경 좋은 머르기트 섬으로 연결되었다. 장기 여행객에게는 최고의 위치 선정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하루에 한 번씩 장을 보는 것도, 아침마다 3k씩 러닝을 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한 달 살기로 계획했던 여행은 점점 스케일이 커졌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데 부다페스트 인아웃은 너무 아쉬웠다. 근처의 다른 아웃 도시를 찾던 우리는 결국 한 달 살기라는 계획표에 빨간 줄을 그어버렸다. 한 달이면 30일이었다. 그 30일을 대체 누구 코에 붙인단 말이야. 한 번 비행기를 탔으면 최소 두세 달은 살고 가야지!


항공권만 예매해도 최소 여행의 50%는 준비된 것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정신을 차리니 인천 출발 부다페스트 in / 바르샤바 out의 항공 e티켓이 이메일로 전송된 후였다. 적은 금액이 아니었음에도 결제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된 심정으로 한참 동안 항공권 예약 내역을 들여다보았다. 출발일까지는 채 한 달도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