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한 달 생활자
08:30 AM
마가리트 섬 러닝 코스
나와 동행인의 숙소는 마가리트 섬으로 가는 다리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아파트먼트의 가장 큰 이점은 역시 접근성이었는데, 도보 3분 거리에 큰 마트와 맥도날드가 있었고 트램 정류장까지도 그리 멀지 않아 생활하기가 참 편했었다. 거기다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맛있는 식당과 카페가 즐비해 있었는데, 관광객이 그리 붐비는 동네가 아니어서 좋았다. 위치로만 놓고 보면 최상의 숙소였는데 그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단연 마가리트 섬으로 이어지는 러닝코스였다.
솔직히 평소 러닝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많아도 3km씩 한 두 번 정도 뛰는 게 전부였는데, 어쩐지 낯선 도시에 오니 괜히 강가를 따라 한 번 뛰어보고 싶은 게 아닌가. 어차피 부다페스트에서 한 달 정도 지내야 하니 건강한 루틴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동행인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공복 러닝을 시작했다. 시작할 때는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달릴 때는 아니었다.. 첫 날에는 2km로 시작해서 그다음 날은 3km, 그다음 주에는 5km를 뛰는 식으로 서서히 운동량을 늘려나갔다. 물론, 으쌰으쌰 독려해주는 러닝앱의 도움이 컸다.
아침에 운동을 하는 이유는 몸을 깨우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나름의 사치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백수 생활의 장점은 남들이 출근할 때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점 아닐까. 동행인과 나는 모두가 바빠 보이는 출근길에 러닝복을 입고 유유히 공원으로 향하며 남몰래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주말도 없이 매일 같이 8 to 8에 묶인 생활을 하던 우리에겐 꿈(꿀)같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최대한 만끽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것도 같다. 아니, 사실 돌이켜보면 별 다른 노력이 필요 없었다. 사회적 책임에서 해방된 것은 둘째 치고, 부다는 눈 닿는 곳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기에 매일매일이 행복했었다.(..고 동행인은 폴란드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부다페스트로 돌아가고 싶다며..)
10:00 AM
Prima Bakery
운동은 거들뿐(...) 동행인과 나는 아침마다 집 밑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라테와 카푸치노를 시켜먹으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대체 이럴 거면 왜 공복운동을 하냐며 웃다가도, 결국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라는 결론으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이 제과점이 바로 집 밑에 있었던 것도 나름의 행운이었다. 직원들도 친절하고 무엇보다 커피랑 빵이 맛있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귀찮은 날엔 이곳에 들려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하곤 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가끔 이곳에 들려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집으로 갔는데, 가격도 저렴하다보니 부담이 크지 않았다.
커피를 워낙 좋아하는 편이라 부다페스트에서도 많은 카페를 방문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결국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집 밑에 있었던 이 제과점이다.
12:00 PM
부다페스트는 산책하기도 참 좋은 도시였다. 치안도 좋고 길도 크게 크게 나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걷기 좋은 도시. 동행인과 나는 한동안 관광객답게 트램을 열심히 타고 다녔지만, 관광지를 다 섭렵한 뒤에는 주로 걸어서 다녔다. 덕분에 하루에 2~3만보씩 걷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먹었기 때문에 체중은 변함이 없었다는 슬픈 결말)
부다페스트에 있는 동안은 한결 같이 날씨가 좋았다. 물론 피크닉을 가려고 했던 날 장대비가 쏟아져서 홀딱 젖긴 했지만 뭐.. 그날 하루를 제외하고는 내내 맑음이었으니.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날씨 운이 대단히 좋았던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사실 날씨 운이 썩 좋지 않은 편인데(그럴 만도 한 게 비성수기에만 여행을 간다) 여름 유럽 여행을 해보고 나서 왜 사람들이 다들 이맘때 여행을 가는구나 깨달았다고. 맨날 우중충한 하늘만 보다가 맑고 탁 트인 하늘을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2:00 PM
부다페스트는 온통 황금빛이었다. 도시의 건물들이나 볼거리가 진짜 '금'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유명 건축물들을 제외한 부다페스트의 일반 주택가와 거리는 화려함보다 단정함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것들은 한낮의 빛을 받으면 부다페스트의 야경처럼 금빛으로 뒤덮이곤 했었다. 밤이든 낮이든 부다페스트는 참 찬란한 도시였다. 단정함과 화려함. 절대 공존하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던 곳이었다. 동행인 역시 부다페스트라는 도시가 가진 미감과 분위기에 흠뻑 빠져 매일을 바쁘게 쏘다녔다. 한 손에는 시나몬을 듬뿍 묻힌 굴뚝빵을 들고서. (괜찮아, 아침에 뛰었으니까..)
4:00 PM
2번 트램
세체니 다리를 통과하는 2번 트램의 첫 정류장이 우리 숙소 근처에 있었던 것도 행운. 덜컹거리는 트램을 타고 국회의사당과 도나우 강, 세체니 다리를 지나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 풍경이 너무 좋아 한동안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 탔었던 기억이다. 트램 요금이 조금만 더 저렴했더라면 매일 같이 타고 다녔을 텐데 말이야. 아, 이런 감상에는 좋은 치안도 한몫했다. 보통 유럽에서는 대중교통에서 물건을 도둑맞을까 잔뜩 긴장하고 다니는 편인데, 부다페스트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라 그런 걱정을 덜했다. 확실히 다른 국가를 여행할 때보다는 심적으로 여유로웠지. 인종차별도 덜하고(없는 건 아니다)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나이스 하고, 네트워크도 잘 터지고(중요)..
그러고 보니 부다페스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네.
5:00 PM
세체니 다리
우리가 매일 같이 건넜던 세체니 다리.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강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껏 부러워했었던 우리. 우리야 잠깐 스쳐지나가는 관광객일 뿐이지만, 저들은 이 도시가 삶의 터전인 사람들 아닌가. 원한다면 매일 같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저 사람들이 무척 부러웠다.
여행자가 로컬 사람들을 보며 갖는 막연한 동경이자 부러움이었다. 언젠가는 지나갈 시간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이기도 했고. '서울에 놀러온 외국인들도 한강에 앉아있는 우리를 보면서 부러워할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우리였다. (가여움을 느끼지는 않을까)
"저 사람들도 똑같이 공과금 내고 직장 생활하면서 살 텐데.. 어쨌든 부럽다.. 매일 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게."
5:30 PM
바람이 세차게 불었던 어부의 요새
이 날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유학하고 있던 친구가 잠시 우리를 보러 놀러왔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날이었다. 친구를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나니 어쩐지 친구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던 우리는 어부의 요새를 찾아 적적한 마음을 달랬다. 결국 지는 노을 보며 센치해지는 바람에 그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 친구가 시간을 내어 놀러와준 덕분에 우리는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해외에서 혼자 씩씩하게 잘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기에 친구를 보내고 나서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 역시 한동안 유학길에 오르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했었던 지라 이 친구를 볼 때면 늘 만감이 교차한다. 그래봐야 남 일인데 오바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타지 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라 내게는 정말 남 일이 아니다. 항상 새로운 경험을 쌓고 견문을 넓혀가는 재미로 사는 친구라는 것을 알기에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잘 되었으면'하고 마음으로 바라게 되는 친구.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지만 너는 더 잘 될 거야. 매년 얼굴을 보는 사이기는 하지만, 해외에서 보니 더 반갑고 재밌더라.
6:30 PM
해 지는 세체니 다리와 엘리자베스 다리
부다페스트의 낮이 1막 그리고 노을이 인터미션이라면, 밤은 2막이다. 막상 쓰고 보니 조금 잘못된 비유 같기도 하네. 저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두고 인터미션이라고 하는 건 왠지 부적절한 것 같으니 노을을 2막, 밤은 3막으로 정정한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저 정도이지, 실제로 보면 훨씬 더 감동적이다. 나와 동행인은 매일 다른 장소에서 지는 노을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을 때렸었다. 점점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예뻤고 그것만으로 우린 족했다. 매일 같이 멋진 풍경을 두 눈에 담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하늘을 보고 있으면 다리를 밝히는 조명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하고, 도시가 낮과는 다른 황금빛으로 물든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강마저도 금빛으로 물든다는 점인데, 여행객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왜 부다페스트가 세계적인 야경명소로 손 꼽히는 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