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누군가가 물었다.
"여행을 왜 그렇게 자주 가?"
내 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대답했다.
"여행을 좋아하니까. 여행병에 걸린 거지."
"여행병?"
"시작이 어렵지, 한 번 가면 병에 걸린 것처럼 자꾸 생각나고 그래. 그러다가 정신 차리면 항공권을 찾고 있고, 괜찮다 싶은 티켓을 찾으면 결제까지는 순식간이지."
"힘들잖아. 고되고, 나중에는 체력도 딸리고."
"힘든 기억은 추억이란 핑계로 희석되고, 좋았던 순간들은 낭만이란 핑계로 부각되어 기억되지. 뇌 구조상 어쩔 수 없나 봐."
그런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한 가지 질문. 여행은 왜 가는 걸까? 애초에 왜 나는 여행병에 걸리게 된 거지?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지로 '왜' 떠나는 걸까?
일상에서의 탈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행? 그것도 틀린 이유는 아니다. 현대인으로서 답답한 일상에서의 탈출 욕구는 매우 당연한 심리이므로.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니었다. 단순히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일차원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아무리 긴 여행이라 할 지라도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이고, 여행이 끝나면 다시 차가운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여행을 잠깐 동안의 일상 탈출!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중에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굉장히 크게 올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나의 경우도 실제로 첫 여행을 유럽으로 다녀오고 난 후 다시 회사 생활에 적응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인도 아니었던가. 몇 년 전 이야기지만 한 여행가가 인도에 다녀온 이야기를 책으로 낸 후 한참 동안 인도 여행 바람이 불었다. '자아 찾기'라는 명목 아래에 떠나는 여행. 물론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여행자가 그렇게 비장한 각오로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다. 자아는 굳이 인도에서 찾으라는 법도 없고,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여행을 통해서 자아를 찾기란 쉽지 않다 생각된다. 본인이 익숙한 환경에서 떠나 새로운 것을 보며 내 안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여행을 통해서 완벽한 '자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도대체 뭘 위해서 여행을 하는 건데? 글쎄.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애초에 그 질문은, 하나의 답만 존재할 수가 없는 질문이다. 어떤 이유 하나만으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여행(Travel)의 어원은 'Travail'이라 한다. Travail은 고생, 고역, 노동을 뜻하는 단어라 한다. 나는 얼마 전 이 사실을 인터넷에서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대륙간의 이동이 지금과는 달리 여의치 않았을 테니, 현대인들이 '여행'하면 떠올리는 그런 낭만적이고 희망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장거리 이동수단이 발달되어 있지 않던 과거와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이 발달한 현대 시대에도 여행이 '고생'이긴 마찬가지다.
장거리 노선의 경우 최소 7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하고, 대화도 잘 통하지 않는 땅에 떨어져서 잘 알지도 못하는 지리를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야 한다. 기술의 발달로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불편이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나, (말을 못 하면 번역기를 사용하면 되고, 길을 모르면 구글 지도를 사용하면 되는 세상이다.) 그런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 굳이 돈을 내고 간다는 것 자체가 고생이고, 항상 여행자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도사리고 있는 여러 가지 위험에 스스로 노출되는 것 또한 고생이다. 그 외에 진짜 다이내믹한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도 있다. 편안한 패키지 관광을 벗어나 오지로 여행을 떠나거나,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전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여행이 주는 불편함을 기꺼이 껴안을 준비가 되어있는 여행자들.
그럼 우리는 왜 그런 고생을 반갑게 떠안으면서까지 여행을 떠나는 걸까? 나의 경우는 그럴 만한 가치를 여행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고국과는 다른 낯선 냄새와 공기,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 낯선 언어와 특이한 교통수단, 기후와 외부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녹아든 생활 리듬, 그 나라 고유한 음식의 간과 맛, 사소한 질서나 매너, 화폐, 식사 예절, 팁 문화, 종교, 그리고 시차까지..
나에게 여행이란, 딱딱한 교육이 아닌 '몸으로 부딪히며 다름을 배우고 이해하는 체득의 경험'이다. 이는 어디 가서 돈으로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본인 스스로 행하여야 하고, 느껴야만 얻을 수 있는 자산이다. 나는 여행을 많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몇 차례의 여행으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저 무언가를 인증하기 위해 바쁜 여행이라면 너무 슬플 것이다.
여행을 통해 내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말 것이다!라는 기대를 안고 떠난 적도 있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가까이서 찾지도 못하는 것을 멀리 떠난다고 보일 리 만무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여행지는 누군가에는 생활의 터전이며, 삶의 현장이다. 그 사이에 잠깐 눌러앉아있는 것으로 무언가 아주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으스대는 것은 위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낯선 땅을 헤매며 여러 가지 귀한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귀인을 만날 수도 있고, 세계 최고로 꼽히는 음식을 먹어볼 수도 있으며, 문화의 발상지에 가서 수천 년 전의 문명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또한 뜻 밖에도 좋은 것들을 보고 누리며 느낀 감정들은 내 뇌에서 재생산되어 추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추억은 언제까지나 공유된다. 아마도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럼, 이제 -다로 끝나는 어체를 정리하고, 제가 한 번 여러분들께 감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여행을 떠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