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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아영 May 05. 2020

n번방, 한국사회의 적나라한 자화상

'강간 문화'와 '전쟁 동맹'을 넘어서

#1

모처럼 친구와 저녁을 먹던 중 텔레그램 알림이 울렸다. '탈퇴한 계정이 새로 가입했습니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친구는 '박사'가 잡힌 이후 자신의 텔레그램에 표시된 탈퇴 계정이 17개이며 그녀의 한 친구는 70건의 탈퇴 계정 알림을 확인하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내 텔레그램에는 지금까지 다섯 개의 탈퇴 계정 알림이 떴다. 내가 알던 사람들 중 다섯 명.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2

친구는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된 이후부터 남성 동료들을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했다. 결국 며칠 전에는 남성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할게. 나 당분간 당신들 쳐다보기가 싫어. 이해해."



#3

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쓴 채로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문득 지금 이 지하철 안에는 몇 명의 가해자가 있을까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지옥이 되었다.




n번방 가입자들을 상대로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인터넷 포털에 이런 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돈 주고 정당한 성인 콘텐츠를 시청한다는 것이 문제이냐, 처벌하려면 자기 몸 영상 올리는 음란녀들을 먼저 처벌해라. 너무 억울해서 잠이 안 온다." "실수로 n번방에 들어가 영상을 다운받았고 유포는 안 했다. 억울하다." "일부 남성들을 가지고 전체 남성들의 문제로 확대하지 마라, 억울하다." 이 억울함의 곡소리는 어떤 래퍼에게 가닿아 그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감정보다 냉정한 이성"이라는 클리셰로 메아리친다.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n번방 사건의 처벌이 감정보다 냉정한 이성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한 번 실수로 야동을 보았다고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선고받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n번방 가입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할 경우, 그것이 선례가 되어 단순한 실수들도 강력한 수준으로 처리될 것이라는 우려란다. 우려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 있을지도 모르는 어린 동생을 끌어들인다. 혹시 가해자가 될지도 모를 남성들의 미래를 위해 지금, 이곳의 피해자 여성들이 겪는 고통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것은 익숙한 풍경이다. 청소년 남성 가해자가 여성 피해자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사례들에서 볼 수 있다. 남성 가해자의 가족과 지인들이 여성 피해자의 책임을 운운하며 남성 가해자의 미래를 위해 여성 피해자의 분명한 피해 사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고, 나아가 피해자를 가해자로 지목하는 사례가 빈번히 목격된다. 물론 이것은 청소년의 경우만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의 해결 과정 전반에서 목격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온라인에서 냉정한 이성의 언어인 척하는 외계어를 목격했다. "내게 딸이 있다면, n번방 근처에도 가지 않도록 평소에 가르치겠다. 내 딸이 지금 그 피해자라면, 내 딸의 행동과 내 교육을 반성하겠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n번방 피해자들에게도 같은 규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과는 별개입니다." 가해자의 범죄는 사라지고 피해자의 태도를 문제로 삼는 이 말의 구조는 독특하다. 이 말을 한 자 역시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에게 있지도 않은 딸이 있는 상황을 가정한다. 가해자들의 긴밀한 공조 속에 진행된 끔찍한 성 착취 범죄 상황을 마주하면서 그는 어째서 피해자 여성들의 행동을 지적하는 것일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에서 권김현영은 "'강간'이 남자끼리 즐기는 짜릿한 '놀이 문화'의 일종으로 '정상화'"된 "강간 문화"를 지적한다. "강간 문화"가 놀이로서, 그리고 이렇게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강간 문화가 놀이 문화로 승인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을 언급한다. "강간 문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남성들은 자신들이 받는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억울해하며, "강간 문화" 속에서 폭력은 섹시한 것, 성폭력은 섹스의 과정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실수로 축소되며, 섹스와 강간을 유사한 것으로 대유代喩된다는 말이다.


강간이 짜릿한 놀이 문화로 승인되는 남성 중심 사회, 나는 이 지점에서 내가 받았던 질문을 하나 떠올린다. "아…. 왜 전쟁은 익사이팅(exciting)한데, 평화는 보링(boring)할까요?" 그리고 자주 받는 또 다른 질문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폭력은 인간의 본성 아닐까요?" 나는 폭력을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폭력적인 사회 문화와 구조 속에서 사회화된 결과이자 복합적인 구성물로 바라본다. 익사이팅한 전쟁 문화와 익사이팅한 강간 문화, 이 둘은 어떻게 만날까?


n번방 사건은 수십여 명의 여성을 성 착취한 영상물을 텔레그램을 통해 거래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다. 피해자 중에는 미성년자도 포함돼 있으며, 최소 수만 명 이상이 관련 채팅방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중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른들은 종종 '친구랑 싸우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인 전쟁의 문제에는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나는 그 이유를 '친구'와 '적'의 이분법에서 찾는다. 싸우면 안 되는 이유는 그 대상이 '친구'라는 전제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전제이다. 굳건한 한미 동맹 속에서 친구인 미국과는 싸울 수 없지만, 친구가 아닌 북한과는 싸울 수도 있는 상황이 지난 70년간 지속되고 있지 않은가?


한국 사회에서 '한미 동맹'은 굳건한 안보의 대전제로 상정된다. 남성 징병제에 기반하고 있는 이 굳건한 '동맹'은 남성 중심 사회의 강력한 근거로도 작동한다. 남성의 보호에 기대어 살아가는 피보호 상태의 여성들은 국가 안보에 있어 무임승차자이며, 이로 인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형성하면서 남성 중심 사회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군대 가산점 문제와 임신·출산의 경력 인정 문제가 동일한 무게로 다루어지지 않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 동맹은 사회 안의 권력이 형성되고 고정되며 승계되는 방식을 독점해 왔다. 여전히 여성 할당제를 운운해야 하는 현실 역시 이를 보여 준다.


공고한 남성 동맹이 없었다면 n번방이라는 끔찍한 성범죄가 어떻게 가능할까? 수만 명이 조직적으로 단결하여 n번방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고 가해자들이 경찰에 적발되는 상황인데도, 가해자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방을 개설하며 성 착취 영상을 유통하는 한편, 검거된 성범죄자를 추모하는 방을 만들어 검거된 가해자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있다. 이 상황은 피해자 여성들에 대한 절대적인 타자화와 일상적 여성 혐오에 기반한 강력한 남성 동맹을 증명한다. n번방은 특수한 공간이 아니고 한국 사회 그 자체를 보여 주는 적나라한 자화상이다.


그렇다. 그 래퍼의 말처럼 사건의 처벌에는 감정보다 냉정한 이성이 정말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한 번의 실수로 영상을 보았을 뿐인데 나는 억울하다', '실수로 입장료가 결제되었을 뿐인데 나는 억울하다'는 가해자들의 감정적 호소에 흔들리지 않고 범죄는 분명한 범죄로 규정하여 냉정한 이성으로 처벌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폭력을 분명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지탱하는 구조를 드러내어 폭력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발생한 폭력을 덮어 주고 용인하며 가해자에게도 너그럽고 따뜻한 것이 아니다. 다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을 채택하기 전에 그 가해와 피해의 상황들에 대한 맥락을 살펴 개별의 존재와 구조화된 폭력 사이에서 폭력이 작동하는 그 결절을 짚어 내는 것은 평화를 세워 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함께 고려되어야 할 지점이다.


n번방이라는 범죄에 대한 수사와 조사, 사회적 논의가 사이버 공간의 성 착취를 넘어서 하루하루의 일상을 잠식하고 한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여전한 남성 중심성과 남성 동맹, 그것을 뒷받침하는 군사주의와 안보주의에 대한 성찰로 확장되기를 희망한다. '평화는 비둘기, 평화주의자는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질문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은 남성 중심 사회가 형성한 '전쟁은 흥분되고, 평화는 지루하다'는 이분법을 수용하여 전쟁 담론의 남성 중심성을 강화하고 평화 담론을 여성화·타자화한다. 이는 결코 부수적이지 않은 작용을 남긴다.


냉정한 이성과 감정의 대립, 이 이분법은 너무도 구태하다. 사람은 분절적이지 않으며 냉철한 이성이 감정과 따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n번방 사건을 파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냉정한 이성만큼이나 치밀하고도 치열한 감정을 붙잡아야 한다. 철저하게 기획된 고립감 속에서 피해자들이 느꼈을 아득한 절망감과 고통은 냉정한 이성만으로는 감히 헤아려 볼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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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뉴스앤조이와 함께하고 있는 연재 "모두를 위한 평화"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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