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한 대통령 후보가 선제타격론을 이야기했다. 논란이 되자, 무턱대고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상황이 오면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 후보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도 말했다. 그 전쟁준비는 수도권을 지키기 위해 그 주변지역에 사드를 추가배치하는 것도 포함한다. 윤석열 후보의 이야기다.
지난 2월 25일 토론회에서 윤석열 후보가 언급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은 로마의 군사저술가 베게티우스가 남긴 문장이다. 무력에 의한 평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용구로 사용된다. 일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 베게티우스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문장은 무력에 의한 평화밖에 모르는 철학의 빈곤을 보여준다. 로마제국의 강성함은 몇 년 가지 못해 무너졌고 그 쇠락의 원인은 다양성을 힘으로 지배하려던 오만과 오판에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푸틴의 무력침공은 정당화될 수 없다. 푸틴은 끝까지 모든 외교적 수단을 동원했어야 했다. 푸틴이 이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대체 왜 전쟁이라는 카드를 선택했을까? 일부 언론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푸틴이 전쟁광이고, 살인마이거나, 과거 러시아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욕에 불타고 있기 때문일까?
2022년을 시작하면서 바이든은 러시아의 무력 침공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어느 순간에는 마치 러시아에게 침공하라는 최면을 거는 주술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뉴스 속 바이든을 보며 미국의 베트남 침공, 이라크 침공을 떠올렸다. 베트남 침공의 근거는 위조되었던 통킹만 사건이었고, 이라크 침공의 근거는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거짓말이었다. 미국은 이 거짓말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미국의 갑작스러운 아프가니스탄 철군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꾸준히 러시아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는 나토의 영향력을 이용하는 바이든의 야욕은 푸틴의 야욕과 어떻게 다른가? 미국 군수산업의 큰 시장인 나토를 들여다보면 서방세계의 암묵적인 먹이사슬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부시의, 오바마의, 바이든의 미국은 푸틴의 러시아만큼 비난 받지 않는다.
제1세계 중심의 식민성은 여전히 힘이 강력해서 아무리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러도 미국은 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표상된다. 동시에 미국이 규정한 적은 야만과 비이성, 비합리의 상징이 되는데, 서방세계의 렌즈로 바라본 세상에서 북한과 이라크, 이란은 악의 축이었고, 무슬림은 모두 테러리스트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인의 정체성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과 러시아인이 아닌 정체성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그 두 가지 입장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민족 사회이다. 그 복잡함과 다양성 속에 우크라이나 내전이 지속되었다. 분리주의자라고 불리는 친러시아 무장세력은 우크라이나 정부군에게는 반군이며 테러리스트였고, 반군이며 테러리스트로 규정된 친러 분리주의자들에게 우크라이나 정부는 서방 친화적이며 자본 친화적인 기득권이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무력분쟁으로 인해 지난 8년 동안 무려 14,000여명이 사망했다. 이런 역사 속에서 발생한 이번 러시아의 침공은 단순히 친러-친서방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맥락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일면 푸틴의 책임이다. 하지만 푸틴만의 책임은 아니다. 이런 사회를 만들어온 이 세계 각국 위정자들의 책임이며 각 국 시민들의 책임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고통을 푸틴 탓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전쟁이 반복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가장 쉬운 해석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고, 안보 불안이 있다하면 선제타격하면 되고, 대충 서울 주변에 사드배치하면 된다는 그런 쉬운 해석처럼.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을 수 없었는가? 아니면 막지 않았는가? 나토 가입을 희망하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는 지금, 미국과 나토는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바이든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러시아의 침공 예언을 그리도 성실하게 했던가? 내부 정치를 위해 전쟁을 동원하는 것은 과연 푸틴뿐일까?
베게티우스의 낡은 격언에 기대어 선제타격의 꿈을 꾸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百戰百勝은 非善之善者也요. 不戰而屈人之兵이 善之善者也라.” 손자병법에 담긴 지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던 손무의 말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아무도 넘볼 수 없을 만큼의 막강한 국방력을 갖추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앞서 경고했던 가장 쉬운 해석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런 해석뿐이었다면 손무는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무가 말한 최선의 조건은 명료하다. 최선은 ‘싸우지 않는 것’에서 가능해진다. 싸우는 순간 그것은 최선이 아닌 것이다.
이제 딱 하루 남았다. 다음 대통령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날이. 정권교체론이 힘을 얻는 듯 보였던 제20대 대선, 한국사회의 동료시민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그리 다양해 보이지 않는 제20대 대선의 선택지, 최선을 만들 수 있는 대통령 후보는 과연 있는가? 있다면 참 쉬운 길이 될 텐데, 그렇지 않다. 남북으로 나뉜 분단처럼, 우리 편, 남의 편 나누기에 바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은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마법처럼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만들 수 있는 명민함과 지혜, 이것만큼은 새로운 대통령의 필수요건이다.
인스턴트 음식이 몸에 해롭듯, 선제타격이면 다 될 듯 말하는 사람은 삶에 해로울 가능성이 높다. 3월 9일, 선택의 몫은 투표권을 가진 모두에게 동등하다. 그리고 쉬운 선택을 내려놓고, 최선을 다해 각자의 한 표를 행사하는 것, 그것만이 모두에게 최선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당신의 선택을 응원하며 전쟁으로 고통 받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