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공인중개사를....
그까이꺼 그냥 자격증 아냐?
31회 공인중개사 시험이 지난 10월 31일 날 있었다. 무려 34만 명이 접수해서 수능 시험을 방불케 했고, 서울대 출신 연예인 서경석 씨도 응시해서 화제였다는데, 그 34만 명 중에 나도 있었다. 투기 광풍이 불어 너도나도 부동산에 관심을 갖고, 정부의 투기 안정 정책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해서 발표하고 있지만, 보란 듯이 치솟는 집값과 전셋값에 다들 난리도 아닌 탓에 그 여파가 공인중개사 시험까지 불어닥친 듯하다.
고등학생 때 우리 옆집 아주머니도 땄었더랬다. 신혼집을 구하러 돌아다닐 때 동네에 깔린 게 공인중개사 사무실이었다. 퇴직 후를 대비해 나도 보험처럼 하나 준비해놓을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미리 따두면 아무나 맘만 먹으면 딸 수 있는 흔한 자격증이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계획은 거창했다. 일단 책을 보자. 6과목 기본 이론서만 사는데도 돈이 꽤 들었다.(공인중개사 시험은 1차와 2차로 나뉘는데 1차는 부동산학개론, 민법 두 과목이고 2차는 중개사법, 공법, 공시법, 세법 총 네 과목이나 된다) 택배로 도착한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거 고시 시험 아녀? 책이 왜 이렇게 두꺼워? 기초지식과 배경지식이 전무하니 강의의 도움을 받아볼까? 유명하다는 강의 사이트를 검색해서 들어가 보니 강사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강의는 또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기초강의, 기본강의, 심화 강의, 기출 강의.... 등등 강의만 보다가 세월 다 가겠다 싶었다. 그래도 십만 원이나 주고 책을 샀으니 공부를 해야겠는데... 공부를 해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것이다. 흥, 이래 봬도 35대 1 넘는 경쟁률을 뚫고 직장에 합격한 나라고... 하는 자만심에 우습게 봤던 게 사실이다.
결과는? 도중에 2차까지 다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차만 응시했는데 부동산학개론 62.5점, 민법 52.5점으로 불합격이다(평균 60 이상이어야 합격). 이과 출신인 나로서는 '법'이란 과목이 너무 생경했다. 법률 용어부터 무슨 뜻인지 몰라서 솔직히 민법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법 공부하시는 분들이 새삼스레 달리 보이는 건 나뿐..?). 시험 준비를 한다고 주변인들에게 이야기는 해놨는데 공부는 정말 안 했다. 공부다운 공부를 한 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변명을 좀 늘어놓자면 그놈의 '코로나 19'때문에 하루 종일 아이를 케어해야 하는 탓에 혼자만의 시간이 부족했다. 막판에 한 달여 남기고 발에 불똥이 떨어진 듯 벼락치기를 했더랬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공부하려고 앉으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굳이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화장실 청소, 잼 만들기, 책 읽기 같은 딴짓들이 너무나도 하고 싶어 졌다. 공부를 하려고 책을 폈다가도 청소를 하느라, 지금 잼으로 만들지 않으면 다 상해버릴 것 같다는 핑계로 잼을 만들고,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아 재미있다'했더랬다(학교에서 공부 못하고 딴짓하는 애들한테 절대 뭐라 하면 안 됨).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굳이 패인을 분석해보자면 '절박함'이 부족했던 것 같다. '한 번 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가짐이 그랬고, 합격이 절실하여 당장 이거 아니면 모든 게 끝나버릴 것 같은 마음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노력'이 부족했다는 뻔한 결론은 내리기 싫은 건 나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두 세 문제를 잘 찍어서 합격을 했더라면 '역시 내가 이렇다니까'하며 자만심에 도취될 나에게 '겸손함'이라는 미덕을 가르치려는 저 위의 누군가의 뜻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은 나에게 건네는 위로) 올해 시험의 운은 나보다 더 절실하게 합격을 원했던, 내 옆에서 혹은 내 뒤에서 시험을 본 그 응시자에게 돌아갔으리라.
짧은 시간 시험을 준비하면서 단지 시간낭비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싶다. 억지로 책을 부여잡으며 견뎠던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험 전엔 전혀 알지 못했던 부동산 관련 잡지식, 기초법 지식 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니까(어디 써먹을 수는 있으려나 모르겠다). 뭔가를 이뤄보려 준비했던 시간들이 '어제'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나로 만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거만해져서 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겸손'의 미덕을 다시금 깨달았으니까.
그래서 내년 32회 시험은 어떻게 할 거냐고요? 어쩌긴요, 또 도전해봐야지요. 책 사놓은 게 아깝잖아요. 내년 이맘때 합격수기를 거창하게 올려 볼 생각입니다. 암요.